말씀을 이루는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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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을 이루는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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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7.12.26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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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찬목사<의왕중앙교회>

2007년을 시작하면서 삶의 소박한 목표와 목회에 대한 야무진 계획을 세웠었다.

목회라는 이름에 묻혀 소홀했던 가족에 대한 나의 태도를 조금 돌려보겠다는 목표를 세운 것이다. 목사의 아내로서 목사의 자식들로서 누가 뭐라고 해서가 아니라도 지고 있는 무거운 짐을 고집스럽게 인정하지 않고, 주님의 거룩한 일에 동참하는 영예스러움만 강조하면서 오히려 목양의 현장에서 가지는 불편함을 가족에게 쏟아 놓곤 했던 것에 대한 반성과 점진적인 변화를 다짐했다. 그리고 본질과 비본질 앞에서 몸에 좋지 않으나 입에 단것을 달라고 칭얼대는 아이처럼, 그 헛된 그 무엇을 내려놓지 못하고, 많은 시간과 생각 그리고 에너지를 낭비하는 내 모습을 발견하고(처음 느끼는 것은 결코 아니다) 본질을 놓쳐버리고 후회하는 내게 주께서 “네 양 떼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피며 네 소 떼에 마음을 두라”(잠 27:23)는 말씀을 주셔서 다시 새겨 주 앞에서 진정한 목양자가 되어 보리라는 야무진 계획을 세웠었다.


하지만 화살처럼 빠른 한해를 살고, 송년의 때에 선 지금 고래심줄처럼 끈질기게 변하지 않는 나를 확인하고 긴 한숨으로 내 심경을 대변할 수밖에 없다.

30여년의 목회자로서의 생을 살아오면서 어느 때부터인가 어설픈 자의식으로 가슴 한편이 할퀸 상처처럼 아리고, 비어 있음에 대한 공백을 자각하기에 이르렀다. 후회 비슷한, 그런 것들이 나의 날들만큼 알지 못하게 먼지처럼 쌓여온 것들일 것이다. 뭔가가 뒤척이게 하는 뒤숭숭한 잠자리처럼, 날 편하게 하지 않는다. 성취를 향해 숨 가쁘게 달려온 만큼 공백이 심하고, 무엇인가를 이루려고 애쓴 만큼 살아온 날들의 뒤안길이 쓸쓸하다. 성취도 이룸도 없어서 일까. 그럴까.


한국교회 목회자들이 다 그렇기는 하지만 나도 목회자로서 말씀을 전하는 횟수가 참 많다. 하루에도 몇 차례씩이나 말씀을 전하고 가르쳐야 한다. 혹 섬기는 우리교회 교회 밖, 다른 교회나 그 어느 곳에서 말씀을 전하거나 가르치는 일까지 있을 때면 뽕잎을 먹지 않고 실을 뽑아내다 기진하여 고치도 되지 못하고 말라버린 누에의 형국이 떠오르기도 한다. 그래서 어쩌다 다른 교회나 등등의 곳으로부터 부름을 받는 경우는 사양의 미덕(?)을 보일 때도 있다. 사실 차멀미처럼 심한 울렁임과 갈등이 있음을 고백한다.


왜 이런 갈등과 고민을 하게 되는가. 나 자신 속에 쌓은 깊이와 삶의 무게 이상으로 말씀을 전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쌓아둔 것이 없이 계속 뽑아만 쓰면 그 결과는 무엇이겠는가. 메신저의 삶과 경건 그리고 영성이 뒷받침 해주지 않는 말씀으로 어떤 심령이 은혜를 받고, 삶의 변화가 일어날 수 있겠는가. 듣는 이 없이 전파상 앞에 틀어 놓은 라디오이고 음색을 구별할 수 없는 그저 울리는 꽹과리가 아닐까.


우리 목회자들이 세월 속에 빠지기 쉬운 함정이라고 생각한다.

말씀과 삶이 이원화되어 강단과 내가 철저히 차별화 되고 구별된다. 그리고 우리는 터무니없는 사변에 빠진다. 약삭빠르고 치부에 능하며 카멜레온처럼 적응에 뛰어나다.


결과는 무엇인가.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은 교회 안과 밖에서의 생활태도가 전혀 다르게 살아도 번민 없이 ‘그럴 수 있지…’ 로 적당하게 상황을 수용해준다. 내가 그러하니까.


주의 교훈과 가르침을 성경에 가두고, 말씀의 능력을 결박하지 않았던가. 그리스도인과 비 그리스도인의 차별과 구분을 없애는데 나는 30여 년간 일조했다는 한숨이 나를 일깨우는 것일 것이다. 이런 번민 없는 생활을 거듭하다가 보니 모르는 사이에 인격에 이중성이 몸에 베여들어 위선자가 되어 버렸다.


2007년을 보내려는 지금 참으로 견딜 수 없이 두려운 것은 이런 나의 실상을 알지 못한 채 퍽 경건한 목회자의 생을 살아왔다고(?) 아니 살려고 노력하며 애썼다고 생각해 온 점이다.


남은 시간은 지난 시간을 포장하는 시간이다. 이루지 못하고 완성하지 못한 날들과 시간들이라도 잘 포장해서 내일을 맞아드리고 내일을 사는 밑거름으로 삼자. 그리고 다짐이 다짐으로, 결심이 결심으로 끝날지라도 또 다시 “성(誠)의 신앙”, 말씀을 이루는 신앙을 향한 다짐을 나는 다시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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