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드리는 기쁨, 헌금하는 재미로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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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드리는 기쁨, 헌금하는 재미로 삽니다”
  • 현승미
  • 승인 2007.11.13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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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과 어려운 이웃 섬기며 나눔의 기쁨으로 사는 서종로장로

저는 요즘 예배드리는 기쁨으로 살고 헌금하는 재미로 삽니다. 틈만 나면 감사헌금 할 기회를 만듭니다. 돌아보면 주변에 감사할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얼마 전에는 초등학교 때 주웠던 돈이 생각나 그에 대한 몇 배의 감사헌금을 하기도 했지요.”


하루하루 하나님 앞에 감사함으로 사는 서종로장로(신림제일성결교회·장동신목사). 그는 교회와 지역사회에서 섬김과 봉사의 대명사가 되었다. 하나님께 받은 복이 너무 많아 하루라도 감사하지 않고는 살 수 없다는 그는 사실 그리 행복한 어린시절을 보내지 못했다. 3살의 어린 나이에 소아마비를 앓았다. 그런데 중학생이 되어서는 결핵성 골수염까지 보태졌다.


결핵균에 의해 골수 속에 생겨서는 안 될 잘못된 뼈와 고름이 생기는 병이었다. 치료를 않고 내버려두면 뼈가 썩어 저절로 부러질 수도 있고 뼛속에 깊이 균이 퍼지기 전에 다리를 자르는 것이 최선이었다.


왼쪽 다리는 제게 살아갈 희망이었습니다. 어려서 앓은 소아마비 때문에 오른발은 가늘고 힘이 없어 걷기는 고사하고 앉을 때마다 다리를 접는 일도 손으로 들어 올려야 가능했지요. 그나마 사람 구실을 하게 해 주는 것도 왼쪽 다리가 저 스스로 움직여 준 덕분이었는데, 정말 천청벽력 같은 일이었습니다.”


결국 서장로는 다리를 자르는 대신 매일 뼈 속의 고름을 빼내며 아픔을 참아내며 살아가기로 결정했다.


“꼬박 27년이지요. 나라의 험난한 시절,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아버지는 억울한 죽음을 당하셨지요. 어머니 또한 자식들 뒷바라지와 아픈 저를 보살피시며 힘든 삶을 사시다가 결국 폐결핵으로 젊은 나이에 삶을 마감했습니다.”


어머니마저 잃은 그에게 희망은 없었다.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는 그가 갈 수 있는 곳, 할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스무 살도 채 되지 않은 나이에 창녀촌으로 들어가 기둥서방 노릇을 했다. 술, 담배, 도박까지 말 그대로 탕자의 삶을 살았다.


“그러다 지금의 아내를 만나 함께 살게 됐습니다. 식은 올리지 않았지만, 가정을 꾸리게 된 거지요. 하지만 제 못된 버릇은 쉽게 고쳐지지 않았습니다. 아내가 벽돌공장을 차려 삶을 꾸리는 동안에도 저는 밖에 나가 여자를 만났지요. 도박도 쉽사리 끊을 수 없었습니다. 그 무렵 아내가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변화 뒤에는 아내 전은경집사의 무조건적인 헌신과 사랑, 기도가 있었다. 돈 한 푼 벌어다 주지 않는 남편. 도박에 바람까지 피우고도 집에 오면 큰소리를 쳤다. 아니 오히려 교회로 향하는 아내의 발걸음이 잦아질수록 의심까지 하게 됐다.


“목사님께서는 심방을 가실 때 꼭 성도들과 함께 하셨지요. 목사님이 부르시면 언제든 달려 나가는 아내를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바람은 제가 피우면서 아내를 의심했으니까요.”


그런데도 아내는 큰소리 한번 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남편을 못 내주겠다는 남편의 애인에게 안 보내줘도 좋으니 같이 살다가 나중에 늙고 병들면 그때 보내달라고 했다.


“만약 그때 아내가 다른 사람들처럼 소리 지르고 죽자 살자 덤볐으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바람핀 저를 탓하기 보다는 나중에 늙고 병들면 그때나 보내라는 아내의 그 말에 저는 새 사람이 되겠다고 결심했지요.”


믿음도 구원의 확신도 없었지만, 아내를 따라 주일성수를 지키기 시작했다. 어쩌다 한 번 가던 것이 점차 횟수가 잦아졌고, 아내의 기도와 봉사로 집사 직분까지 얻게 됐다.


“그저 아내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교회에 나가는 걸로 갚은 것이지요. 매일 다리에서 나오는 고름을 닦아주며 병을 나을 수 있도록 몸에 좋다는 건 무엇이든지 구해다 주었습니다. 그러다 79년도에 마지막 수술을 하게 되면서 열심히 하나님과 목사님을 섬기게 됐습니다.”


수술대 위에 눕혀진 그를 위해 목사님과 아내가 함께 간절한 기도를 드렸다. 수술은 성공이었다. 27년간 그를 고통스럽게 하던 고름도 멈추었다. 일주일 한달이 지나고 20년이 지난 지금 고름은 멈췄지만, 그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멈추지 않고 오히려 더 커져만 가고 있다.


수술 후 교회는 열심히 다니게 됐지만, 믿음의 성장은 더디기만 했다. 살아가는 동안 순간순간 하나님을 의심했고, 교회 건축을 하는 동안에는 교회를 떠나야겠다고 마음먹기도 했다.


“그때 건축위원을 맡고 있었는데, 건축을 하는 동안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작정 헌금 500만원을 제외하고도 벽돌 값 360만원을 받지 못해 시험에 들었지요. 교회와 결별을 앞두고 처음으로 기도를 하게 됐는데, 기도방법도 몰라 무작정 벽돌 값 달라고 기도했어요. 나도 모르게 평생 처음 아버지를 불렀습니다.”


태어나서 한번도 입에 담지 못한 단어 ‘아버지’. 그는 영의 아버지가 자신을 부르는 음성을 들었다.


“아버지 집을 지으면서 돈을 달라는 아들인 저를 꾸짖으셨지요. 그래 아버지라고 불러도 좋을 분이 정말 있다면 벽돌 값은 한 푼도 안 받아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로 달려가 건축헌금에 그 벽돌 값을 써넣었지요.”


누구보다 자신의 마음이 편안해졌다. 돈 한 푼 없고, 당장 눈앞에 어음 결제일이 다가왔지만 두렵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다. 실제로 아침 7시에 출근해야 할 공장 직원들이 자발적으로 새벽 4시에 출근했다. 당시 벽돌 만들기가 수공업에 가까워 하루 2만장 정도 밖에 만들지 못하던 벽돌의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서였다. 놀랍게도 서장로 공장의 벽돌을 사겠다는 업자들까지 문전성시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하나님의 물질 축복이 시작됐습니다. 물론, 사업이 항상 잘 되지는 않았지만, 부족할 때는 언제든지 하나님께서 채워주셨습니다. 헌금 하는게 그렇게 즐거울 수 없었습니다. 누가 봐도 터무니없어 보이는 작정헌금이었지만, 지금까지 어겨본 적이 없습니다.”


이제는 아내조차도 그를 당해내지 못할 정도로 교회와 하나님의 일이라면 누구보다도 제일 먼저 발 벗고 나서는 서종로장로. 그는 요즘 예배 드리고 헌금하는 재미 말고도 나눔의 행복감에 푹 빠져있다.


“2년 전 교회에서 목적이 이끄는 40일 작정기도를 하게 됐습니다. 작정기도가 끝난 후 내가 이 땅에 왜 왔을까를 고민하게 됐지요. 그때 시작한 게 바로 쌀 나누기입니다. 교회는 하나님 앞에 축복 받았지요. 그런데 교회 안 다니는 사람은 먹지도 못하고 굶어 죽으면 지옥에 가야하잖아요. 교회 주변에서 굶어 죽는 사람이 있으며 나중에 하나님 앞에 가서 우리가 어찌 얼굴을 들 수 있겠습니까.”

내 집 앞, 내 교회 주변부터 돌보자며 시작된 쌀 나누기는 어찌 보면 무모했다. 처음 한두 명씩 늘어가던 숫자는 금세 250명~300명으로 늘어갔다.


“부족하지 않게 모두에게 돌아갈 수 있을까 두려운 마음도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매번 일정 숫자를 유지하게 하셨던 것 같아요. 그게 벌써 2년이나 됐네요. 이제는 일주일에 한번씩 반찬도 해서 나눠주고 가끔 그들에게 식사대접도 하고 있어요. 그 가운데 예배도 드리고 자연스럽게 전도도 하고 있지요.”


이미 15년째 섬기고 있는 ‘희망장애인선교회’부터 달리다굼장애인선교회, 개척교회 지원사역 등 서장로의 사역은 열 손가락으로도 부족할 정도이다. 지난달 회갑을 맞아 나눔의 기쁨으로 사는 자신의 삶을 담은 신앙간증집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를 펴내기도 한 서종로장로. 평생 이웃과 더불어 사는 삶을 살겠다고 다짐하는 그를 통해 확장될 하나님 나라의 미래를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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