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타적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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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타적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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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6.11.08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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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핵집목사<열림교회>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프로크루스테스 침대가 있다. 자신의  침대를 만들어 놓고 다리가 길면 잘라 버리고 다리가 짧으면 늘려서 침대에 맞춘다. 신화는 결코 전설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오늘 현실 속에서도 존재하고 있다.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는 자기중심주의적인 것을 폭로하고 있다.


자기중심적으로 모든 사물을 보고 제단하기 시작하면 거기에는 항상 희생이 뒤따르게 되어 있다.


지난 5월에 기장 평화운동본부가 주관한 “동아시아 평화를 위한 국제 심포지움”에  미국의 이든 신학교의 마이클 키네만( Dr. Michael Kinnamon) 교수가 성서연구를 진행했다.


요한1서에 나타난 사랑을 주제로 평화 문제를 생각하는 시간이었다.


그는 요한이 속해 있는 교회공동체는 외부의 적들과 내부의 적들로 인해 위협을 받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불안과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들이 지니고 있는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사랑을 말하지만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고 말한다.


자신들의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을 만을 위한 사랑을 말하고 배타적이며 이분법적인 사랑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사랑은 매우 위험한 요소를 지니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배타적인 사랑은 필경 나와 너를 갈라 세운다. 승자와 패자를 가르며 내 편과 적으로 갈라놓게 된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배타적 사랑 때문에 몸살을 앓고 있다. 어느 하나를 기준으로 하고 줄서기를 강요당하고 있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자신의  안녕을 위해  줄서기를 할 때  한쪽에서는  반드시 희생으로 고통을 당하게 되어 있다.


이러한 배타적인 사랑이  정치, 군사, 경제적으로 야합할 때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고  평화는 사라지고 만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사랑은 무엇인가?  자신을 행해 저주하는 자들을 용서하시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시는  주님의 모습에서 배타적인 사랑을  찾아 볼 수 없다.


미움의 고리를 끊고  적개심이 논 녹듯이 사라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나 자신만을 위해  안전을 도모할 때  한편에서는 두려움과 공포에 떨어야 하고 내가 풍요를 구가할 때 한편에서는 기아와 가난과 싸워야 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내 생명을 지킨다고 방어할 때  저편에서는 생명이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까마득하게 모르고 살아간다.


세계는 안보를 말하고 경제정의를  말하고 있지만  보이지 않게  편가르기가 진행되고 있다. 어느 한편에 서지 않으면  불안할 수밖에 없고 고통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예수께서도 당시 유대인으로 태어나서 유대인으로서 유대인에 편에 설 것을 강요받았다.


유대인으로  유대인을 사랑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이방인을 사랑하는 것을 불가능하다.


유대인을 사랑하는 만큼  저편에 있는 이방인에게는 증오심을  키우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예수님은 이 배타적인 사랑의 강요를 뚫고 그 경계선을 넘어 사랑을 보여 주셨다.


배타적으로 편가르기가 진행되는  중심에서 그 담을 허물고 넘어 선다는 것은 자신에게 고통을 가져다주고 손해를 주기 때문에  쉬운 일이 아니다.


주님의 선택적인 사랑의  결과로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오늘 우리 안에는  바로 배타적인 사랑 때문에 아픔과 고통이 진행되고 있다. 배타적인 사랑을 넘어 주님의 십자가의 자리는 바로 자신을 희생해서 다른 이를 살리려는 선택적인 사랑의 자리이다.


오늘 한국교회가 바로 이 자리에 선다면 증오와  적개심을 넘어  생명과 화해 평화의 꽃을 피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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