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세감소 통계를 보는 교계가 드러낸 '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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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세감소 통계를 보는 교계가 드러낸 '허상'
  • 윤영호
  • 승인 2006.10.31 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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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21세기 한국사회와 교회
▲ 북이스라엘 여로보암은 남유다에서 제사드리는 율법을 깨고 북쪽에 새로운 제단을 만드는 등 새로운 종교를 창출했다. 우매했지만 세상적으로는 지혜로웠다.

 

 

“성장 조급증 걸려 복음사역을 계량화 하다”   

 
최근 주간지 ‘시사저널’이 우리나라 기독교의 쇠퇴현상을 정부 통계청이 발표한 종교인구 분포 집계를 인용하며 심도 있게 다루었다. 통계청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 1995년부터 2005년까지 개신교 인구가 약14만 명이 감소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 집계를 놓고 시사저널은, 밖으로 표현하지 못하고 내부에서 걱정일색이던 한국교회의 속사정을 보여주며 대응책 마련에 부산한 교회의 상활을 보도했다. 그러면서 한국개신교는 불교와 천주교가 성장하고 있는 가운데 유독 감소세를 보인다며 ‘개신교는 왜 홀로 쇠퇴 하는가’라는 내용으로 심층 진단했다. 이 보도는 ‘한국교회 미래를 준비하는 모임’이 밝힌 ‘개신교 감소 통계’를 인용하는 가운데 이들이 제시한 원인 중 ‘대외 이미지 관리에 실패했다’는 것을 비중 있게 다루며, 다른 한편으로는 성장세에 있는 천주교나 불교계의 소식까지 곁들이고 있다. /


개신교의 인구감소는 통계청의 자료가 아니었더라도 기독교 안에서 이미 수년 전부터 토론주제로 나올 만큼 화두가 돼 온 내용이다. 10년 사이 14만 명이 감소했다는 집계와 이와 달리 불교, 천주교의 교세는 오히려 늘었다는 집계가 나란히 게재됨으로써 한국교회만 홀로 감소했다는 것이 통계청 관련 기사의 전체 흐름이다.


하지만 우리는 사회과학이 만들어낸 또 하나의 위대한 작품 ‘통계’가 어쩌면 성장 지상주의에 빠져 복음의 본질을 흐려왔다는 비난을 받아온 한국교회를 또 다시 과거의 그 시간대로 옮겨놓으려는 것은 아닌가 하는 ‘과거회귀’의 어두운 그림자에 맞서 있음을 알아야 한다.

‘유일한 교세 감소’라는 개신교 관련 안팎의 분위기가 지속되는 가운데 급기야 교계 단체들이 ‘한국교회 마이너스 성장 진단과 대안’이란 주제를 들고 모임을 갖기 시작했다. 제안되는 내용을 잘 보아야 하겠지만, 기독교 교세감소 통계발표 이후 진행되고 특히 주제가 마이너스 성장인 것을 전제하면 감소된 교세성장을 어떻게 끌어 올리느냐가 주된 사안일 것으로 예상된다.


비판하던 성장지상주의 또 재현

교단적으로는 경사(慶事)에 속하는 예장 합동총회와 개혁총회의 교단합동은 지난 79년 이후 결별해 있던 두 교단의 재결합이란 측면에서는 긍정적이지만, 교단합동 이후 흘러나오는 ‘1만 교회 돌파’라든가 ‘100노회 돌파’라는 구호에서는 사실 부정적인 기능이 앞서고 있다. 교세확보가 전쟁의 형태로 진행되는 수년 동안의 교세배가운동의 희생자 가운데 우리는 모든 사람들의 축복 속에 세워졌다가 언제인지도 모르게 조용히 문을 닫는 무수한 개척, 미자립교회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교세배가가 복음전파로 이어지면 가장 좋은 일이겠지만, 현실은 우리의 기대를 곧 잘 저버린다. 합동총회의 교단합동을 놓고 일부에서는 ‘세 몰이’로 표현하기도 하며 다른 교단과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려는 시도로 평가하기도 한다. 교회성장연구소가 내놓은 자료 역시 한국교회의 변화를 교인의 수평이동으로 보는 한편 이 가운데 목회자의 리더십이나 설교능력 등이 수평이동에서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된 것으로 보고하고 있다.

복음전도 덕분에 교회가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담임목회자의 성향, 이를테면 설교를 감동적으로 하는지 혹은 교적관리를 체계적으로 하는지 아니면 민주주의 시대에 맞게 교인들로 하여금 교회행정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도록 평등적 관점에서 교회제도를 운영한다든지 등등 기존 신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매우 발달된 관리체제로 교회가 정착돼 있는지 여부에 따라 교회가 성장한다는 것이 목회를 진단하는 여러 단체들의 분석이다. 불신자 전도 보다는 기존신자의 이탈을 막는 방향으로 목회패턴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 연구소의 진단이며, 이에 따라 불신자 전도가 아닌 기존 신자의 수평이동이 대대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얘기다.

시사저널이 이슈로 잡은 ‘개신교는 왜 홀로 쇠퇴 하는가’라는 제목은, 언제나 수량적인 계산을 통해 분석하는 세속적 관점으로 볼 때는 매우 당연한 문제제기이다. 이렇게 세상은 언제나 수량적이며 예측가능하며 합리적인 판단만을 미덕으로 여기며 이같은 관점을 적용하지 않는 단체를 매우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곤 한다. 성경에 나타난 이스라엘 백성의 삶을 살펴보면, 하나님의 방식 대신 사람들의 관행과 관습을 따라 살다가 저주받은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고통의 원인은 하나님의 진노 때문이 아니라 ‘세상의 방식과 관행’을 버리지 않은 이스라엘 백성 자신에게 있었던 것이다.


측정과 판단 위한 연이은 계산

열왕기상 12장 이하의 말씀은 좋은 본보기가 된다. 여로보암의 죄가 드러난 12장에서는 예루살렘의 솔로몬 성전에서 제사 드려야 하는 북이스라엘백성의 상황을 주목한 여로보암이 그들이 남유다쪽으로 가는 것을 막기 위해 북쪽 ‘벧엘과 단’ 두 곳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그것을 하나님이라며 제사하도록 했다. 금송아지가 하나님이라고 한 것도 죄이지만, 솔로몬 성전 한 곳을 지정하신 하나님의 의도를 정면으로 부인한 것이 무엇보다 큰 죄였다.


하지만 생각해 보자. 북측의 왕인 여로보암의 입장에서는 적대적 관계에 있는 남유다로 ‘제사 때문에’ 가는 자신의 백성들을 지켜만 보고 있어야 했을까. 혹시라도 반란이라도 일으킬까 노심초사했을 것이 분명하다. 여로보암은 특히 하나님의 선택에 따라 지정됐어야할 제사장마저 아무나 되도록 했다(왕상12:31). 하나님의 소명이 없어도 돈만 내면 누구나 제사장이 될 수 있도록 했다.

여로보암은 아히야 선지자로부터 하나님의 뜻에 따라 10지파를 이끌 북쪽의 왕이 될 것을 들었다. 그래서 그는 ‘선택받은 자신’을 돌아보며 자신의 결정이 곧 하나님의 결정일 것으로 착각했었던 것 같다. 세속적 관점으로 볼 때, 여로보암은 정치적인 관행과 한 국가로서의 왕답게 행동한 것이 분명하다.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꼭 솔로몬성전에서만 예배드릴 필요가 없었고, 금송아지라고 해서 바알을 숭배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하나님으로 생각하고 제사도 지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살았던 여로보암을 악한 왕으로 규정했다. 자신을 왕으로 삼으신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하지 않은 것이 가장 큰 죄였다. 자신의 정치적 환경을 봄으로써 하나님을 잊고 말았다. 왕상12:26에 “그 마음에 스스로 이르기를”은 하나님께 묻지 않고 스스로 판단한 것을 말한다.


복음+세상관행=합리적 복음?

여로보암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은 덕분에 참과 거짓이 교묘히 섞인 자신의 종교를 만들고 말았다. 31~32절에서는 “유다의 절기와 비슷하게”했다고 했다. 여로보암은 세속의 관점에서는 탁월한 지혜자였다. 제사의식을 도입했고, 제사장도 위촉했으며 절기까지 창안했다. 가장 번성했던 솔로몬의 영광을 또 한 번 누릴 것 같은 호화로운 시스템을 완성한 것이다.


여로보암의 스타일은 하나님을 따르기보다 관행을 따르고 정치적인 이해관계를 계산한 매우 합리적이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판단이 없었다.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모든 교회의 사명이며 기독인의 사명이다. 땅끝 선교에 누구하나라도 제외되는 기독인은 없다. 하지만 그것이 숫자놀음의 근거가 되어서는 않될 것이다. 세상은 자산규모와 직원종사자수, 매출액, 급여수준을 근거로 기업을 판단한다. 통계 대상이 되는 것만이 의미가 있는 것이다. 언제부터인지 교회에도 기업평가 방식이 등장하더니 모든 것이 계수화 되어 가고 있다.

이는 다른 말로 ‘사역이 수량화’되고 있다는 말이다. 이같은 경향은 순전히 판단과 평가를 위해서다. 즉 사역에 대한 평가를 위해서 수량화는 불가피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되물어 보아야 한다. 누가 사역을 평가하라고 했으며, 그 대안은 어떻게 선택되고 있는가.

교세감소라는 세상언론의 보도는 매우 적절하다. 이것을 보도한 곳이 세상언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감소라는 단어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교회의 모습은 여간 씁쓸한 게 아니다. 그렇다고 숫자가 무의미하다는 것은 아니다.

복음의 본질이 수량에 있는 것이 아닌데도 자꾸만 계량화해서 교회의 정체성과 복음의 본질을 세속의 것들과 혼합함으로써 여로보암의 종교처럼 ‘괴상한 종교’가 만들어질까 우려되는 것이다. 성장을 약속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기에 그가 제시하는 방식만을 따르면 된다. 시대에 뒤떨어졌다며 세상문화를 기술적으로 섞는 기술은 파멸로 가는 꾀에 불과하다는 것이 성경의 교훈이다. 성령충만한 교회를 간구하는 한국교회가 되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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