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21세기 한국사회와 교회-성경이 말하는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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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21세기 한국사회와 교회-성경이 말하는 정치
  • 윤영호
  • 승인 2006.10.26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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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들어 한국교회는 정치적 이슈를 내용으로 집회를 열고 있지만, 이를 종교행사로 보는 사람은 적은 편이다. 교회의 정치 행보는 과연 어느 수준까지 허용될 것인지 논란이 많다.

“현실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현하게 하라”   

우리는 정치에 대한 성경의 입장이 사뭇 궁금해지는 시대에 살고 있다. 정치개입을 불허했던 한국교회 보수권은 어떤 해명의 절차도 없이 그리고 신학적인 연구과정도 없이 어느 날 갑자기 정치영역을 넘어 들어와 “순교를 각오하며 교회를 사수한다”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70~80년대 진보권의 대정부 항의집회를 정치운동이라며 비난했던 시절을 회고하면 어리둥절할 사람들이 많다. 현재는 반대로 기독교진보권은 정부정책을 홍보하고 옹호하는 비율이 높은 것이 사실이다.


과거 반정부 집회를 주도하던 얼굴들이 지금은 정부 관련 기관 단체에서 중책을 맡고 있어 민주화를 외치던 교회의 70년대 정치적 고난을 평가절하 하는 의견이 커지고 있다. 과거에 반정부 입장을 외치던 사람들이 정부정책 홍보대사로 나서고 있고, 또 정부와 교회는 서로 다른 영역이라서 정부의 결정에 교회가 개입해서는 안된다는 사람들이 최근에는 정부정책을 비난하며 대규모 군중집회를 주도하는 기이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진리를 가르쳐야 할 교회가 상황에 따라 다르게 처신하는 모습이다. 성경은 정치에 대해 과연 무엇이라고 말할까.


정치의 출발점은 ‘부르짖음’

성경은 정치가 무엇인지 알려주기 위해 기록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정치란 이런 것이라고 단정적으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세속정치 역시 다스림이라는 개념을 포함하는 이상 성경과 중첩되는 부분을 찾는다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창세기 4장에서 인류최초의 범죄현장을 본다. 가족간의 비정어린 살인사건이 발생하는데 우리는 이 부분에서 살해당한 아벨의 피가 어떤 상황에 있는지 알려주는 성경의 표현을 주목하게 된다. “호소하느니라.”(창4:10) 아벨의 피는 매우 억울한 자신의 상황을 절규하며 부르짖고 탄원한다는 것이 성경의 표현이다. 이는 하나님께 재판해달라는 요구로 보인다.

호소하고 부르짖는다는 성경의 표현은 창세기 18장 소돔과 고모라 성 안의 궁핍한 사람들에게서도 발견된다. 가장 눈에 띠는 부분은 출애굽의 원인으로 설명되는 히브리인들의 울부짖음이다. 애굽인들의 학정에 시달리다 못한 히브리인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고작 ‘부르짖는 것’이었다. 호소하고 탄원하고 절규하는 일 이외에 그들이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 절규대상은 하나님이셨다. “무엇인가 억울한 일을 당했으니 해결해 달라”는 호소였다. 정의와 공평을 촉구했을 것이고 직접적으로 ‘법적인 판결’을 요구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여튼 보호받고 싶은 사람들로부터 행해진 탄원의 소리 부르짖음으로 혹은 호소로, 절규로 나타난 것이다.

하나님은 아벨의 피가 호소하는 바를 듣고 응답하셨다. 재판을 하신 것이다. 하지만 생명만은 보호하셨다. 살인자 가인은 추방당했고, 하나님은 살인에 대한 정의를 실천했다. 하나님이 직접 재판하셨고 직접 판결하셨다. 하지만 창세기 9장6절에서 하나님은 창조세계에 대한 인간의 청지기적 사명을 세우신 자신의 결정을 이행하셨다. 자신이 직접 재판하고 판결하기보다 사람 스스로 이 일을 대리하도록 하신 것이다. 홍수가 끝났을 때 하나님은 ‘대리청정’을 요청했고, 이를 처음 훈련받은 사람은 아브라함이었다. 소돔과 고모라 멸망을 앞두고 의인논쟁을 벌였던 아브라함은 대리청정의 혹독한 시험을 치러야만 했던 것이다.

출애굽 지도자 모세 역시 대리청정의 모델이다. 히브리인들의 울부짖음을 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기 시작했고, 이어 10가지 재앙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자신의 능력 안에서 발현했는가 하면 시내광야에서는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받아 그것을 근거로 무수한 백성들의 사소한 분쟁거리들을 재판해야 했다. 하나님의 정치를 대리해서 진행한 것이다.

성경은 뒤를 이어 이스라엘 전체 역사에 걸쳐 사사기 시무엘서 열왕기서에서 법률제도와 정치제도의 발전사를 세심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부르짖음을 듣고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정의로운 판단이야말로 우리가 말하는 ‘정치’의 근거라고 성경은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다.


성경은 정치지도자를 주목한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할 부분이 있다. 성전의 제사행위와 관련된 사람들, 이를테면 제사장이나 레위인들에 비해 왕과 사사, 선지자들에게 할당된 성경의 비율이 훨씬 많다는 점이다. 현재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와 뜻을 깨닫기 위해 세상보다는 교회 안에 더 많은 관심을 둔다. 교화봉사를 하지 않으면 혹은 순종 잘 하면, 헌금에 인색하지 않으면, 예배출석을 잘 하면 등등 우리는 교회생활이야말로 우리의 인생을 풍요롭게 하는 바로미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성경이 주목하는 부분들을 연결하면 우리의 생각이 얼마나 잘못돼 있는지 알 수 있다.


사사들은 이스라엘에게 무엇이 선과 악인지를 결정했다. 뒤를 이어 왕제도가 시작됐고 이와함께 선지자가 등장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법에 근거해서 늘 왕에게 도전했다. 바로 이 부분이다. 사실상 성경은 성막이나 성전에서 제사장들이 행했던 활동보다는 사사들과 왕들이 한 일에 훨씬 더 많이 주목하고 있다.

우리가 감명 깊게 기억하고 있는 성경인물들을 떠올려 보자. 모세, 여호수아, 다니엘, 다윗, 솔로몬은 우리가 기억하는 위대한 인물 가운데 으뜸일 것이다. 이들은 매우 영적인 사람이었지만 제사장도 아니었고 성정봉사자도 아니었다. 이들은 바로 자신의 정치적인 역할을 감당했던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이들의 정치적 사명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 역할은 제사장과 사뭇 달랐다. 성경은 이 두 역할, 즉 왕과 제사장을 확실하게 구분했다. 여로보암과 웃시야 두 왕은 그 동기가 결코 나쁘지 않았음에도 제사장의 역할을 맡아서 희생제사를 드렸다가 벌을 받았다. 죽거나 문둥병에 걸렸다.

풀러신학교 교수면서 기독교 정치관련 저서를 쓴 폴 마샬박사는 이를 두고 “교회와 국가의 분리는 미국으로부터 출발된 이론이 아니라 구역성경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하면서 “하나님은 교회 안의 목사나 장로에게만 관심을 두시지 않고 전 세계 국가의 법률이 어떻게 이루어져 있으며 제대로 집행되는지 주목한다”고 밝히고 있다.

결론은 간단하다. 성경이 주목하는 것이 제사장이 아니라 왕이었다면 지금 역시 하나님이 주목하는 부분은 정치지도자일 것이다. 역할과 책임이 크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윗을 굴복시킨 나단의 결정처럼, 아합과 이세벨의 폭정에 가시발언을 서슴지 않던 엘리야처럼 교회와 정치는 참여의 수준을 넘어서면 않된다. 정치참여는 가능한 일이지만 정치개입은 비성경적이라는 말이다. 백성들의 탄원과 호소, 절규를 듣고 공의로운 재판관으로서 백성들에게 공의와 정의를 베푸는 국가가 되도록 국가수반을 질타하고 설득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프랑스 전 대통령 자크 시라크는 정치를 “가능성의 예술이 아니라 필요한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예술”이라고 했다. 가독교인은 이 말을 “정치는 올바른 것에 대한 지지를 획득하고 가능하게 만드는 예술”이라고 바꾸어야 할 것이다.

폴 마샬박사는 이렇게 주장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올바른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싸움, 좌절을 주기도 하고 자유를 주기도 하며 우리를 지치게도 하고 활기 있게도 하는 이 싸움에 들어가라는 부르심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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