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자리는 어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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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자리는 어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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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6.10.11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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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핵집목사<열림교회>


우리는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믿는다. 이 말은 하나님이 모든 것의 주인이라는 말이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긴다는 것은 모든 것을 빌려 쓰고 있다는 말이다.

진정 그런가?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진정 고백하고 살아가고 있는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창조절에 묻고 또 물어야 할 질문이다.

고대 근동의 신들은 어떤 신이었던가?  인간의 힘을 극대화하여 신적인 모습을 갖춘 것들이 아니었던가?

애굽의 파라오는 신으로 군림해 세상을 지배하려 했다. 인간이 신으로 군림하는 데는 많은 희생이 뒤따라야 했다. 이 희생의 한가운데는 항상 약자들이 있었다. 피라미드 구조의 하층부에는 신을 떠받드는 고통과 희생이 있었다.

하나님은 그들을 불러 계약을 맺었다.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되고 너는 나의 백성이 된다. 이게 계약사상의 내용이다. 언제 신이 그런 계약을 맺었던 적이 있었던가? 수직적인 지배구조 속에서 사람들의 희생을 강요했지 신과의 수평적인 구조는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계약관계는 쌍방 서로의 책임이 존재한다.

그 책임가운데서도 약한 쪽보다 강한 쪽이 더 책임을 져야 한다. 너와 나 사이에 계약이 파기되면 그것으로 끝이다. 하나님은 그 계약을 이행하시기 위해서 끝없이 자신을 내어 주신다.

창세기 첫 장을 열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고 말씀하신다. 왜 창조기사가 1장과 2장에 서로 다른 기사로 나오고 있는가? 성서는 질문을 던지는 만큼 대답하신다.

이 두 기사는 서로 다른 이야기가 아니다. 하나는 홍수가 범람하는 곳에서  물을 막아 삶을 풍성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말하고 있고 다른 하나는 사막에서 강을 내어 물을 풍성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말하고 있다. 메마른 땅에 있든 물이 범람하는 땅에 있든 하나님은 그것들로 해를 입지 않게 하고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채우시는 분이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역사 한가운데 개입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이다. 저 멀리에서 우리의 삶을 관망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다. 우리의 고통을 함께 나누시고 우리의 기쁨을 함께 나누신다. 깊은 신음소리를 외면하지 않고 처절한 고통 속에 함께 울고 웃으시는 하나님이시다. 우리와 맺는 계약 때문에 하나님은 한순간도 우리를 떠날 수 없다. 가까이 계시고 함께 숨쉬고 계신다.

하나님은 결국 우리 곁에 계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자리를 포기하셨다. 사람의 모습으로 우리 곁에 오셨다. 이게 성육신 사건이다.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피라미드 구조의 가장 밑바닥에서 희생당하는 자들의 곁에 계셨다.

결국 자신의 몸을 찢어 모든 이에게 나눠주시고 희생해서 생명을 찾게 하셨다. 이게 십자가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으셨다. 모든 창조물을 우리에게 주시며 권리금을 받지 않으셨다.

오히려 자신을 우리에게 나눠주시어 풍성하게 하셨다. 오늘 우리 교회가 설자리가 바로 여기 아닌가? 교회의 크고 작음을 자랑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목회자의 능력을 자랑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결국은 나눠주고 흔적조차 없이 갈 것인데….

하나님께서 자기중심주의를 버리고  인간이 되기를 결단하셨던 것처럼 교회는 그렇게 할 수 있는가? 교회중심주의를 버리고 자신을 찢어 나눔으로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자리에 설 수 있는가?

그렇다면 거기에 희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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