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십 평생 오직 하나님 아방만 의지했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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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십 평생 오직 하나님 아방만 의지했수다”
  • 현승미
  • 승인 2006.07.13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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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섬마을 종달리의 작은 밀알을 꿈꾸는 해녀 할머니 김완선권사
▲ 권사임직식때 가족들과 함께

지중해의 푸른 바닷가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 아름다운 섬, 제주도. 찾는 이마다 탄성을 내뱉는 황홀경의 물빛. 누군가에게는 그저 사진 속 풍경에 지나지 않는 그곳이 어떤 이들에게는 가족의 생계를 위한 일터가 된다.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검은 잠수복으로 뒤덮고 망사리를 매고 호미를 들고 바다로 나서는 해녀들. 저마다의 사연을 짊어지고 물속에 몸을 담근다.


“아직도 물에 못 갈 땐 몸이 근질근질 함수다.”


남제주군에서 시작해 한 바퀴를 돌아 마침내 섬 끝에 다다르면 만날 수 있는 마을, 종달리. 그곳에서 평생을 해녀로 바다를 벗삼아 살아온 김완선권사(종달교회·최남규목사)를 만났다.


그녀의 해녀인생은 12살때 시작됐다. 아직 어리광을 부릴 나이. 하지만 시퍼런 바다는 그를 그저 12살 여린 소녀로 놓아두지 않았다. 수십년의 바다생활. 엄마가 돼서도 물질로 6남매 모두를 키워냈다. 자녀들도 장성해 모두 제 가족을 이뤘다. 이제 그의 나이 74세. 손주들의 재롱을 보며 편안히 지내도 될 법한데, 그는 아직도 물을 그리워한다.


“여긴 그런 곳이에요. 여자가 태어나면 당연히 물질을 해야 하는 곳.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10살이 넘어서면 어른들을 따라 바다로 나갔죠. 해녀생활이 오랫동안 몸에 배어서 지금도 종종 물질을 나갑니다.”


해녀는 힘들고 위험한 직업이다. 그동안 양식업이 발달했다. 이미 관광자치구가 되어버린 제주에서 굳이 위험한 바다일을 하지 않아도 다른 일거리는 충분하다. 때문에 이제는 바다 해녀를 찾아보기도 쉽지 않다.


“아마 지금 40대 후반정도가 마지막 해녀 세대 일겁니다. 60대까지는 물질을 주업으로 삼고 살았지요. 이제 우리 세대가 끝나면 해녀도 사라지겠지요.


다시 그가 살아온 만큼의 세월이 지나면 해녀는 사전 속 두글자로 남아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칠십 평생 그렇게 힘겨운 해녀생활을 했다기에는 김완선권사의 얼굴이 너무 곱다. 얼핏 보면 60대 초반 정도. 자세도 바르고 몸 가누기가 특별히 버거워 보이지도 않는다. 


“보통 해녀들은 바다 속에서 장시간을 생활하기 때문에 주로 귀가 잘 안 들립니다. 몸 이곳저곳 아픈 곳도 많지요. 그런데 전 이렇게 건강합니다. 다 하나님의 보살핌 덕분이지요.”


그저 말뿐인 신앙이 아니다. 예부터 바다에서 생계를 꾸려가야 하는 섬문화는 제사 에 익숙하다. 굿이며, 제사 등 미신에 대한 전통이 뿌리 깊게 박혀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는 한 번도 제사를 지내본 적이 없다. 정월 대보름 사람들이 바닷가에서 굿을 지낼 때도 눈길 한번 준적이 없다고 한다.


“어릴 적부터 신앙이 있진 않았어요. 굿을 하지 않아서 바다가 두렵다거나 한 적도 없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이미 하나님의 계획하심이 있었던 것 같아요. 본격적으로 교회에 다니기 시작한 건 애들 아방(남편) 덕분이에요.”

▲ 종달교회 최남규목사님과 함께
 
부락의 이장을 맡고 있던 남편 부정원집사. 알고 보니 종달교회의 창립멤버였다. 당시 남편을 따르던 지역 유지들이 함께 교회 살림을 꾸려가며 믿음을 키워 나갔다. 아이들도 교회학교에서 꿈과 비전을 키웠다.


 “큰아들이 중학교 1학년 되던 해에 아방이 갑자기 뇌출혈로 쓰러졌지요. 그렇게 쓰러진 후 병원에서 겨우 2달 살다 하나님 품으로 갔습니다. 그때부터 집안형편도 어려워졌지요.”


그 후로 하나님의 연단은 계속됐다. 손대는 일마다 모두 실패였다. 6남매를 이끌고 단칸 셋방으로 옮겨가야 했다.


“아무 준비도 없이 남편을 보내고 너무 힘들었습니다. 사람들도 다 떠났죠. 하루하루 삶이 너무 고달팠어요. 신앙생활 안 하는 사람도 편하게 사는데 내가 왜 이런 환란을 겪어야 하나 원망도 많이 했습니다.”


너무 힘든 나머지 집조차 교회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사를 했다. 당연히 교회 근처에는 가지도 않았다. 주일에도 밀감 따는 일을 하러 다녔다. 그가 하나님을 떠나도 하나님은 언제나 그와 함께 계셨다. 교회를 떠난지 20일. 그는 다시 하나님 곁으로 돌아왔다.


“밀감을 따다가 그러면 안 되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게 누구 덕분이냐. 내가 그나마 하나님의 은혜로 이만큼 살았지 싶더군요. 그때부터 다시 새벽예배에 나갔어요.”


믿음생활 중에 받은 연단은 그를 더욱 굳건하게 세워냈다. 그 후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흔들리지 않고 종달교회를 지키고 있다. 부모를 본받아 장성한 자녀들은 각자가 섬기는 교회에서 장로직분을 받고, 권사, 집사가 됐다.


교회 일에도 단연 누구보다 솔선수범이다. 둘째 아들은 회계집사를 맡았다. 셋째딸은 교회 성가대장이다. 둘째사위는 제주시에서 목사안수를 받아 자신의 교회를 섬기고 있다. 그에게 걱정이 있다면 단 하나. 교회의 교인부족이다.


“요즘 제 기도제목은 우리교회가 예전처럼 다시 부흥하는 것입니다.”


처음 부임한 이우선목사는 확장식 전도로 교세를 불려나갔다. 단순한 교인 수 증가가 아니라 진정 하나님의 은혜로 교인들이 몰려들었다.


“그때 이곳 사람들 학력도 높고 종교성도 강했습니다. 몇 백명씩 집회에 몰려오고 지역의 힘 있는 젊은 사람들은 모두 종달교회에 다녔지요.”


그런데 돈을 벌기 위해 일본에 다녀온 사이 교인들이 인근의 새로 생긴 교회로 다 떠나고 겨우 30-40명만이 남아 있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그때 교회에 대한 지역 사람들의 인식이 많이 나빠져 있었지요. 속상해서 울기도 많이 울었지요. 교회를 떠나간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싸우기도 해보고 설득도 해봤지만 소용없는 일이었지요. 나 혼자라도 교회를 지키겠다고 마음 먹었지요.”


그때 이후로 교인은 30-40명 수준을 겨우 유지하고 있다. 그나마 김완선권사 또래의 연령층이 많아 걱정이다.


“나 혼자라도 지키겠다고 했지만, 나나 내 또래들이 죽고 나면 교회는 누가 지킨단 말입니까.”


다행히 2002년도에 부임해온 김민수 목사가 지역사회를 섬기는 프로그램들을 진행하며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 뒤를 이어 올 3월에 종달교회에 부임한  최남규목사와 함께 오직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전도로 교회를 부흥시키겠다고 김완선권사는 약속했다.


가녀린 몸으로 짙푸른 바다에 몸을 던졌던 12살 작은 소녀. 그가 육십 평생 따올린 숱한 바다 양식이 아이들을 키워냈듯이 이제 남은 시간 그가 전하는 복음의 양식이 종달리 사람들의 영혼을 건강하게 키워낼 것이다.


하나님이 쓰실 한 사람. 주름진 제주 해녀의 기도로 종달교회가 부흥되는 꿈을 꾸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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