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1세기 한국사회와 교회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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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1세기 한국사회와 교회를 말한다
  • 윤영호
  • 승인 2006.06.22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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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월적 거룩성 외면, 종말론적 교회상 '상실'
 
 
최근 교회의 모습이 과거와 사뭇 다르다는 지적이다. 시대의 필요를 충족하기 위한 복음적 처방으로서 교회가 그 자신의 모습을 변화시킨 것이라면 다행한 일이지만, 시대흐름에 밀려 자신도 모르는 사이 변해가는 것이라면 교회의 변신을 다행스럽게만 바라볼 수는 없을 것이다.

교회모습 변화가 21세기를 사는 현재, 우리들에게 문제로 다가오는 것은 임박해오는 하나님의 심판에 앞서 이제 다가올 종말을 고지하고 이후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써 복음적 삶을 살도록 해야 하는 교회의 대사명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에 대답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같은 질문은, 교회내적으로는 교회공동체가 임박한 심판을 준비하는 초월적 거룩성을 유지하고 있는가라는 교회의 본질을 되새기게 하고 있으며, 교회외적으로는 세상을 복음으로 변혁시킬만한 영적 에네르기를 갖고 있는지 그 여부에 주목하게 만들고 있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초대교회(진보측에서는 원시그리스도교회로 말한다)가 당시의 사회경제 시스템에 편입되지 않고, 어쩌면 탈시대적인 모양새를 띠고 있었음을 신약성경을 통해 알게 된다. 장기간의 훈련을 통해서 경험되어야만 가능한 ‘새로운 공동체 생활에의 적응’이 단지 오순절의 성령강림이 불러일으킨 초월적 경험을 통해서 단 번에 이루어질 수 있다는 점이 현대교회의 상황과 비교되는 대표적인 부분이다.


교회의 존재패러다임 세상기관과 똑같아 
초대교회에는 사회적으로 신분이 낮은 사람들이 대다수였지만, 유복한 귀족출신들을 포함해 정치계 인물, 재계인물, 이방인, 혼혈인 등이 참여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갈등이 전혀 없던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 바울서신서가 보여주는 내용들이다.

믿음이 깊은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사이에 나타나는 신앙적 행위의 문제, 유대 그리스도인과 이방그리스도인의 갈등, 해외디아스포라와 본국의 유대기독교인 등 바울서신서는 초대교회의 갈등현상을 비교적 소상하게 전해주고 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그리스도의 보혈과 부활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공동체 형성을 확산시키는 데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당시까지만 해도 교회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한 사람들의 공동체로 자임했고, 다른 사람들도 그것을 인정했다는 얘기가 된다.

초대교회 공동체는 예수를 직접 경험한 사도들을 중심으로 확산돼 갔으며, 구제와 봉사를 담당하는 집사들이 공동체 안팎의 일을 담당했다. 공동체의 필요는 돈 많은 귀족들도 참여했지만 돈 없고 힘없는 사람들까지 참여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고 한다. 집사의 역할은 성경에도 나타나있듯이 기도에 힘쓰는 사람으로 덕망이 출중해야 수행할 수 있는 것이었다. 물질을 집행하는 직분이었으나, 이들이 공동체에서 가장 먼저 해야 했고 가장 많이 해야 할 일은 ‘기도’였다. 구제와 봉사가 그들이 할 일이었지만, 이 일은 반드시 ‘기도’에 의해 수행되어져야 했음을 의미했다.

앞에서 밝힌 대로라면 초대교회 공동체는 당시의 사회경제 패턴과 확연히 다른 것이어서 세상과 구별이 가능했을 것이다. 또 주목할 부분은 이 공동체가 로마를 비롯한 절대강국의 처절한 박해 송에서도 유지되고 확산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에 대한 진실이다. 세상의 기술에 의지하지 않았다는 점이 첫 번째 진실이라면, 두 번째 진실은 초월적 거룩성에 그들의 공동체를 내어 맡겼다는 사실이다.

초대교회는 세상 속에 있던 공동체요 세상의 구성원들로 이루어진 공동체였지만 이상하게도 그들의 목표는 세상공동체가 바라던 것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경험하는 지금의 교회는 초대교회와 비교할 때 무엇이 다를까.

필요하지만 제도개혁의 한계 인정돼야
교회갱신을 주창하며 교회갱신협의회(대표회장:옥한흠목사)가 출번한 지 10년이 지났고, 이를 범교단적으로 확대한 연합기관인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가 조직된 지 이제 8년을 지나고 있다. 우리에게는 생소했던 교회개혁의 절박성을 알리는 소리가 교회 밖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그것도 교회지도자층에서 튀어나왔다는 점에서 매우 고무적으로 받아들였지만, 현재까지 드러난 점을 종합할 때 개혁과 갱신이라는 단어창출 외에 우리 교회공동체의 일그러진 모습을 회복하는 데는 아직까지 가야할 길이 요원하기 만하다는 지적이다.

개혁과 갱신을 요구하는 교회들의 소리가 10년 이상 메아리쳤지만 그 10년 이전과 비교할 때 별다른 변화의 기미를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갱신과 개혁을 촉구하는데 앞장섰던 교회들의 공통점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상하게도 작은 미자립교회들의 이름은 구석에 있는지 대부분 대형교회와 그에 버금가는 교회들이 주류를 이룬다. 거꾸로 말하면 교회의 세속화라는 비난에 직면했던 부류의 교회들이 개혁과 갱신을 주창했다는 결론이 나오는데, 좀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세속화라는 비난을 모면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는지 생각하게 한다.

사실 교회는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기 위한 방주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이 심판의 진노를 피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하면, 예수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는 하나님의 임박한 심판을 피하는 유일한 장소가 된다. 교회공동체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바로 죄로 인해 심판의 날을 계수하시는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피할 수 있음을 의미했다.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에게 이웃에게 이 사실을 알려 교회공동체의 일원이 되도록 한 초대교회의 노력은 따라서 매우 절박한 것이었다. 이렇게 교회공동체를 유지하게 한 동력은 하나님이 심판의 임박함을 알려줌과 동시에 피할 방법도 알려준, 이른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었던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공의(심판)와 사랑(구속)이 복음의 핵심인 것이다.

세속화 주범 대형교회가 개혁을 주창?
현재 한국교회를 비롯하여 세계교회는 분열된 제도교회의 대통합에 주목하면서 개신교의 예배일치와 신구교의 예배일치 그리고 더 나아가 가톨릭과 정교회의 일치에 무게중심을 두고 있다. 힘든 만큼 가치있는 일임에 틀림없지만,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전해야 한다는 것이 교회의 대사명이라는 기준에서 본다면 이같은 세계교회의 노력은 오히려 걱정을 자아내게 한다. 교회가 공동체라기보다는 기관에 가까움을 스스로 인정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에서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 문제도 제도연합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재론되어야 마땅하다. 분열은 자제돼야 할 부분이지만 대사명을 억압하는 주요인은 아니다. 연합단체인 한국기독교총연합회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를 통합하려는 노력 역시 대사명을 기준으로 재론돼야 한다. 현재 추구하는 교회의 개혁과 갱신의 초점이 제도적인 개선과 개혁에 국한된다면 또 다른 개혁주제가 튀어나올 것이 분명하고 그것을 위한 조직체가 만들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비슷한 문제와 해결방법이 반복될 것이라는 예상이다.

이 시대 우리가 냉정하게 바라보아야 할 교회의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세상에 뿌리박은 교회가 이제 2천여 년이 흐르는 동안 세상의 한 기관으로서 자리 잡았다는 사실을 피부로 느끼고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예배할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서만 수백억 원을 들여야 하고 해외유학 경험과 학위가 있는 사역자를 우대하는 풍토는 분명 ‘초월적 거룩성’을 가져야할 교회공동체의 색깔과는 거리가 먼 것들이다. 현세의 삶에 비중을 두는 예배행위가 이어지면서 포기보다는 집착을 낳았고 결국 사회공동체에 달라붙은 세상의 기관이 되어 교회는 이제 ‘대사명’ 대신 그 기관들의 ‘대연합’을 추구하며 과거의 그 어느 때보다 이 세상에서 더욱 큰 기관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개혁이 아니라 세속화를 가속시킬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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