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1세기 한국사회와 교회를 말한다-호국의 신념과 전쟁의 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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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1세기 한국사회와 교회를 말한다-호국의 신념과 전쟁의 소문
  • 윤영호
  • 승인 2006.06.19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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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전쟁이 기독교 대안인가.
▲ 한 나라와 민족을 지키기 위해 무기를 개발하는 것은 성경적으로 볼 때 미련한 짓이다.


 

“한 국가의 영적 건강이 무기보다 강하다”     

인류창조 이래 전쟁은 어쩌면 인류의 생존방식으로 여겨질 만큼 끊이지 않았다. 역사적으로 나타난 전쟁의 원인은 다양했다. 전통적으로 종족 간 갈등이 화근이 된 때도 있었고, 자신에게 예속시키려는 강대국의 힘 과시도 주요 요인 가운데 하나였으며, 국가건설에 동원할 노예확보 때문에 전쟁포로들이 동원되기도 했다. 현대시대 전쟁은 사실 국가차원의 생존과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산업혁명 당시에는 생산품의 원료공급지 확보가 절실했었고, 생산품이 만들어진 다음에는 이것을 팔아야할 시장개척이 필수사항이었기에 전쟁은 국가의 정치 경제정책의 한 방법이다. 과거에도 그랬듯이 전쟁은 국가생존전략의 중요한 수단이 되고 있는 것이다.

 

사회과학계가 보는 1950년의 한국전쟁은 사회주의권과 자본주의권의 충돌이다. 1917년 볼세비키혁명 성공 이후 짜르 왕정을 퇴각시킨 소련의 이 새로운 체제는 지리적으로 인접한 신생 독립국이었던 우리나라에까지 자신의 영역에 포함시킬 속셈이었다. 이것은 일본패망의 결정적 역할을 담당했던 미국의 입장에서는 매우 불쾌한 것이었다. 한국전쟁은 이른바 냉전시대를 알렸던 적절한 사례로 인용되곤 한다.


베트남전쟁은 냉전이 고조되던 시기에 일어난 사건에 분류된다. 매일 새로운 무기들이 앞다퉈 개발되던 시기에 일어난 베트남전쟁 결과, 인도차이나 반도의 여러나라가 반자본주의적 성향을 가진 나라들로 바꿔졌다. 소련입장에서는 영역이 넓어졌고, 미국의 입장에서는 영역이 좁아진 ‘실패한 전쟁’으로 기록되고 있다. 군사전문가들은 한국전쟁을 재래식무기들이 대량 사용된 전쟁으로, 베트남전쟁은 첨단 현대무기들의 실험전쟁으로 해석하곤 한다.

베트남전쟁의 교훈은 첨단무기로도 이기지 못할 전쟁은 있으며, 그 승패는 ‘전쟁에 대한 지지여부’가 가름한다는 것이었다. 베트남 국민들은 자신의 전쟁에 개입한 미국의 판단을 배격하며 미국에 협조하지 않았다는 것이 군사전문가들의 밝히는 미국패전의 요인이었다. 반대로 한국전쟁은 유엔의 개입을 절실하게 요청했고 국민 역시 이를 지지했다는데서 차이점이 드러나고 있다. 


일체의 전쟁을 반대하는 평화주의

어느 나라에서건 전쟁은 엄청난 상처를 남긴다. 하지만 성경은 전쟁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또 다른 섭리를 보여주곤 한다. 부패하고 타락한 이스라엘을 징계하는 수단으로 사용하시고, 때로는 아예 망하게 하시는 구속의 역사 가운데 가장 중요한 수단으로 활용하심을 본다. 그렇다고 해서 전쟁을 성경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전쟁을 바라보는 교회의 입장에서 가장 설득력을 얻는 것은 ‘평화주의’이다. 가장 가까이 ‘양심적 병역거부’를 주창하는 사람들이 여기에 속한다. 평화주의의 뜻은 “개인이나 집단 또는 국가가 폭력을 사용하는 내전이나 혁명 및 국제분쟁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여기에 동조하는 사람들은 십계명 가운데 6계명인 살인하지 말라는 것을 어길 수 없음을 강조하면서 원수사랑과 산상수훈에서 나타난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야 할 것을 주장한다.
▲ 영적건강은 개인의 신앙 뿐만 아니라 국가의 흥망성쇄를 죄우한다.

더 나아가 평화주의자들은 전쟁을 탐욕의 소산으로 보며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선한 일을 도모하며 화평하라”는 사도 바울의 교훈을 강조한다. 복음서와 서신서가 평화주의를 말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지만, 평화주의는 교회역사상 소수파에서 줄곧 제기돼 왔다.

대표적 교부였던 터툴리안(A.D. 160~220)은 기독교인 군인이 전쟁거부로 죽은 것을 순교로 해석했으며 오리겐(A.D. 185~254)도 전쟁을 부인하지는 않았지만 전쟁에 그리스도인의 참여는 반대했다. 이외에도 형제단(the Brethren)과 재세례파 계통의 퀘이커교도들, 메노나이트교도들이 이에 속한다.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선택한 이들의 판단은 전적으로 옳다. 누가 전쟁을 좋아하겠는가  마는 문제는, 이들의 주장이 ‘아가페적 공동체를 향한 평화윤리와 칼의 권세를 쥐고 정의를 수호하는 국가윤리를 혼동한다’는 점이다. 이 평화주의가 국가와는 별개로 주장된다는 점에서 곤혹스런 부분이 있다는 얘기다. 얼핏 듣기에 평화주의가 대단한 종교적 매력이 있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국가의 무장해제가 교회를 유익하게 하지도 않으며 평화를 약속하지도 않을 것이라는 부분에서는 심각한 문제가 야기된다. 무정부상태에서 복음전도가 얼마나 가능할지 생각하면 될 일이다.


공격전쟁과 구별된 전쟁은 옹호해야

기독교 입장에서 모든 전쟁은 악하지만은 않다는 것이 우리들이 알아야할 핵심이다. 정의를 수호하고 약한 자를 위한 전쟁을 다른 전쟁과 구별하지 않는 것은 문제라는 입장이다. 학자들은 ‘용인된 전쟁’을 ‘정당한 전쟁’(Just War)이라고 부른다. 이 입장은 4세기경 암브로스와 어거스틴에 의해 발전되고 13세기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체계화 되어 가톨릭과 개신교로부터 승인돼 왔다. 1530년 아우구스부르그 신앙고백과 1647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 “정당하고 필요한 경우에 전쟁을 감행하는 것은 합법”이라고 했다.


정당한 전쟁에 따르면, 모든 전쟁이 정당하지는 않으며 전쟁은 칼의 권세를 부여받은 정부가 정의로운 방법으로 선량한 사람들을 지키고 정의를 구현하기 위하여 수행할 때만 정당하는 것이다. 물론 철저한 규칙이 있다. 군사력은 의도된 것에 만 사용할 것, 최후의 수단으로 전쟁이 진행될 것, 반드시 성공이 예상될 것, 국제협약을 준수할 것, 비군사지역과 민간인에 대한 철저한 봉쇄가 있을 것 등이다.

전쟁은 국가 안의 가증한 범죄를 척결함으로써 하나님의 심판대상이 되지 않도록 방지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이것에 한해서만 정당한 전쟁이 된다는 얘기다.

하지만 우리는 이 세상이 정당한 전쟁을 허용한 것이 역사상 한 번도 없었고 따라서 앞으로도 이같은 전쟁이 불가능할 것을 안다. 그럼에도 교회가 ‘정당한 전쟁’을 주장해야 할 이유는 전쟁을 통해서 침투하는 사단의 간교한 폭력성을 드러내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요동치게 해서 모두를 파괴하려는 사단의 술수는 우리들의 영적인 긴박성을 요구한다.

그러나 우울하게도 정당한 전쟁은 실현가능하지 않는 환경에 있다. 생화학 무기, 핵무기, 지뢰매설 등 과거에는 예상하지 못할 가공할 무기들의 개발은 정당전쟁의 허구성만 파헤치고 인간의 파괴적 죄악성을 노출시킬 뿐이다.

미국의 부시 대통령이 이라크 전쟁을 ‘정당한 전쟁’으로 천명했음에도 세계가 이를 인정하지 않은 것은 전쟁이 방어적 전쟁이 아니라 공격전쟁이었고, 미국이 사용한 무기들과 정당한 전쟁의 본질이 사뭇 달랐기 때문이다. 매설된 지뢰로 민간인의 피해는 급증했고, 무차별 폭격에 따른 미간시설의 파괴와 사상자 출현이 잇따라 나타났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가 주목할 부분은 핵의 시대에는 정당한 전쟁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는, 용인된 전쟁이 아니라 가장 최소한의 파괴력을 지닌 무기개발을 하라는 것도 아니라 ‘한 국가의 영적인 건강을 유지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무기를 준비하는 것보다 더욱 성경적’이라는 사실을 선전하는데 주력해야 한다. 교회는 핵무기의 숫자를 세고 그 위험성을 지적하는 소극적인 입장을 넘어 한 나라 통치권이 영적인 건강을 유지하고 성장하도록 역동적인 대안을 마련해야 하고 동시에 국민들에게도 영적인 건강을 공급해야 한다는 적극성을 지녀야 할 것이다. 이것은 한국교회 뿐만 아니라 아시아권 교회들 그리고 세계교회가 연대와 협력을 통해 국제적으로 영적 네트워크를 구성함으로써 실현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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