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로 상처 치유하며 예수님을 닮아가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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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로 상처 치유하며 예수님을 닮아가는 사람
  • 현승미
  • 승인 2006.06.15 16: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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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박물관건립을 위해 노래하는 가수 홍순관집사

올해로 우리나라는 해방 51주년을 맞이했다. 그 지나온 세월만큼이나 세대가 거듭돼 갈수록 6.25의 상처와 흔적들은 조금씩 잊혀져가고 있다. 그나마 매년 6월, 그 명맥을 유지하는 크고 작은 행사들이 치러진다. 6.25의 상처가 모두 치유된 현상일까? 허울 좋은 각종 행사에 전쟁 이민자들, 입양아들의 진짜 아픔은 묻혀버렸다.


그는 평화를 위해 움직인다
여기 진정한 평화를 꿈꾸는 작은 몸짓이 있다. 가수 홍순관 집사, 오는 22일 신촌 창천교회 본당에서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평화박물관건립을 위한 ‘춤추는 평화’ 공연준비를 하고 있는 그를 만났다.


“진정한 평화가 무엇인지 알리고 싶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전쟁박물관은 있는데, 평화박물관은 없습니다. 물론 전쟁의 실체를 후손들에게 남겨주고 그때의 굴욕을 잊지 않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것 못지않게 평화를 찾아주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공연은 왜 지금 평화를 노래해야 하는지, 왜 평화박물관을 세워야 하는지 공유하고 뜻을 모으기 위한 공연입니다.”


새삼 사전을 찾아보니 평화는 인간집단 상호간에 무력충돌이 일어나지 않은 상태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평화를 찾았는가?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인 우리가 단지 무력충돌이 없기 때문에 ‘평화’를 가졌다 말할 수 있는가? 홍순관 집사가 말하는 진정한 평화는 조금 다르다.


숨쉬는 세상, 그게 평화죠

“사람들이 온전히 자기 숨을 쉴 수 있는 것, 그것이 평화지요. 지금 정신대 할머니들이 자기 숨을 쉬고 있습니까? 아니면 해외 교포나 입양아들이 온전히 숨 쉬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한국인도 아니고 그 나라사람도 아닌 교포 2, 3세대들에게 한국의 정체성을 알려주고, 그들을 품어줄 수 있어야 합니다. 평화는 어느 한곳의 평화가 아닙니다. 지구촌 전체가 평화의 숨을 쉴 때 비로소 평화가 오는 것이지요.”


때문에 그가 세우고자 하는 평화박물관은 지금의 독립기념관이나 전쟁기념관처럼 박제되고, 정적인 곳이 아니다. 방문객이 스스로 참여할 수 있는 살아 숨 쉬는 평화를 만들어 내는 곳이다. 박물관이라고 해서 단순한 역사자료관을 의미하지 않는다. 공연장, 영화관, 세미나실, 연수시설 등을 두루 갖춘 평화센터를 건립하는 것이다.


교포2세와 입양아들이 고국을 방문했을 때 영상과 자료와 각종 프로그램을 통해 한국의 바른 역사인식을 돕는 것. 한국과 북한의 예술가, 그리고 가난한 아티스트들에게 행복한 무대를 선물하는 것. 다른 환경과 배경에서 자란 젊은이들이 모여 서로의 생각을 나누는 곳. 이것이 홍순관집사가 꿈꾸는 평화박물관의 모습이다.


그저 아픔을 나누고 싶었을 뿐

그가 모든 사람이 제 숨을 쉴 수 있는 평화박물관 건립을 꿈꾸게 된 데는 특별한 인연이 있다.


“94년도에 ‘전후책임을 촉구하는 한일 한마당’에 기획과 진행을 맡게 됐습니다. 10년 동안 정신대 할머니를 위해 공연하면서 LA 이민사회와 일본 가와사키 교회에서 귀한 만남들을 갖게 됐습니다. 그 인연이 제 삶의 방향을 결정해주었지요.”


가와사키 교회는 강제징용으로 인해 일본에 끌려갔던 사람들을 위해 세워진 교회이다. 50 여 년 동안 폐쇄적인 삶을 살아온 그곳 사람들에게는 한국말도, 그 나라 말도 서툴고 불편하기만 하다. 그런데 인적조차 드문 그곳에 한국의 젊은 청년이 기타 하나 들고 자신들을 위해 노래하겠다고 방문을 한 것이다.


“할머니 한분이 갑자기 제 허리를 껴안더니 정부도 관심 갖지 않는 일을 젊은 사람이 어떻게 알고 이렇게 찾아왔느냐며 한스러운 말씀을 내뱉으셨습니다. LA이민사회에서 느꼈던 외로움과 갈망 그 이상의 것이었지요. 그 때 노래꾼 입장에서 그들의 아픔을 어떻게 품어 줄 수 있을까, 한국에 필요한 것이 뭘까를 고민하게 됐고, 그 결과물이 바로 평화박물관이지요.”


2004년 정신대 할머니들을 위한 공연 10년을 마감하고, 2005년부터 곧바로 평화박물관 건립을 위한 운동을 시작했다.


“2000년도에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이 베트남 민간인을 대량 학살한 것에 대해 사죄운동을 벌이고 있을 때였습니다. 일본 ‘위안부’로 끌려가셨던 문명금, 김옥주 두 분 할머니께서 더 이상 당신들과 같은 전쟁의 피해자가 없길 바란다면서 7천만 원의 돈을 내놓으셨는데, 그 돈을 종자돈으로 삼았지요.”


종자돈을 잘 키우기 위해 (사)평화박물관건립추진위원회(www.peacemuseum.or.kr)를 결성했다. 제일 먼저 이민자와 입양아들을 위한 위로가 급선무라 생각한 그는 박물관건립 모금공연을 해외에서부터 해 나가기로 결정했다. 그는 그 역사적인 첫 공연장소로 마틴루터킹 목사의 고향인 아틀랜타를 선정했다.


“흑인과 백인은 같은 식탁에 앉아 밥을 먹을 수도, 같은 버스를 탈 수도 없는 인종차별이 가장 심하던 그 시절에 그는 인종차별이 없는 세상을 꿈꾸었습니다. 그리고 그 꿈은 실현되었지요. 저도 그곳에서 제 꿈을 시작하기로 마음먹었지요. 박물관 건립 1차 목표액은 100억입니다. 쉽지 않겠지만, 제가 노래할 수 있을 때까지 박물관 건립을 위해 노래할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 불가능은 없죠

불가능을 가능케 해주시는 하나님을 향한 그의 믿음은 지난해 말 뉴욕 링컨센터 공연으로까지 이어졌다. 음악가의 마지막 무대, 꿈이라고 알려진 그곳. 웬만한 국보급 가수가 아니고서는 설 수 없는 그곳에 맨손에 가방 하나 둘러매고 간 동양인이 작은 기적을 만들어냈다.


“공연 일주일 전까지 표 한 장 못 팔았을 뿐더러 공연 전날까지 같이 공연하기로 한 팀이 비자발급을 받지 못한 상태였지요. 정말 누가 벼랑 끝에 서 있는 저를 떨어뜨려줬으면 하는 마음까지 들었답니다. 그런데, 이미 공연장 대관을 해놓은 상태고 그들에게 저는 인간 홍순관이 아니고 ‘한국인’의 대표였기 때문에 거기서 물러나거나 좌절 할 수 없었습니다. 정말 불가능한 일에 하나님께서 기적을 보여주셨지요. 다행히 하나님께서 이제까지 사심 없이 걸어온 길을 헤아려 주셨기 때문에 내려주신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당신의 평화에 ‘기립박수’를

공연은 대성공이었다. 관람객들은 기립박수로 환호했고,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홍순관집사는 이제 그 감동의 무대를 고스란히 옮겨 오는 22일 창천교회 100주년 기념공연에서 선보일 계획이다.


초등학교 시절 집 담장으로 넘어온 전도지 한 장을 움켜쥐고 그대로 교회로 달려갔다는 홍순관집사. 그렇게 교회에 다니기 시작한 이후로 예배는 물론 교회봉사에도 그 누구보다 열심을 내었다. 중학교 때부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고, 대학교 때는 이미 대구, 경북지역에서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세상나라의 부귀영화보다는 하나님 나라의 영화로움과 하나님의 기뻐하실 일을 택한 것이다.


“만일 예수님이 노래하는 사람이었다면 어땠까를 상상해 봤습니다. 예수님은 교회 안에서 중·고등부학생들이 어떤 찬양을 좋아할까만 고민하지 않으셨겠지요. 분명 세상 밖으로 나가서 이 시대의 문제가 무엇일까. 메시지가 무엇일까를 생각하며 함께 숨 쉬며 노래했으리라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그랬던 것처럼 세상 가운데에서 이 시대의 고민과 상처와 아픔을 노래하며, 치유와 회복을 선물하는 노래꾼 홍순관집사. 그에게서 진정 이 시대를 고민하는 예수님의 향기를 느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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