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 경건운동에 뿌리 둔 독립교회 ‘성경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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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 경건운동에 뿌리 둔 독립교회 ‘성경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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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6.05.10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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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식교수<한국성서신학대학>

한국 기독교계에는 생소하게 들리는 독립교회 선교단체 연합회가 수년전에 결성되어 급성장하고 있다. 독립교회란 때로는 개교회주의라고 불렸는데 실제로 이 개교회주의는 개신교 종교개혁운동과 함께 출생했다.

그러나 장로교나 감리교 등 교단교회의 선교활동에 의해 개신교가 최초로 한국에 소개 된 까닭에 한국에서는 독립교회라든가 개교회주의 라는 개념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실제로 개교회주의를 주장하는 침례교회까지도 한국에 들어와서는 교단교회로 변신을 했다.

독립교회 문제와 연관해서 루터(1483-1546)와 칼빈(1509-1564)을 기점으로 그 이전에 종교개혁을 주장하고 나왔던 개혁자들에 관해 관심을 기울여야할 인물들이 몇 사람 있다. 루터가 로마 가톨릭교회의 파면 처분을 받고도 개혁운동을 추진 할 수 있었던 것은 독일의 후레드릭공의 보호를 받았던 까닭에 가능했던 것이다.

이때는 이미 붕괴된 로마제국의 형체를 계승한 신성로마제국이 있었으나 신성로마제국은 사실상 로마제국의 유령에 불과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서방 유럽은 로마제국의 틀에서 벗어나 제각기 민족 단위 국가들로 구조조정이 진행되고 있었다. 교회는 하나라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우주주의적인 틀에서 벗어나 민족단위 국교 제도인 교단교회로 분리하는 계기가 되었다.

칼빈은 제네바 시의회에 고용된 상태에서 제네바시의회의 지시를 따라 종교개혁을 추진했다. 제네바는 한 개의 도시국가에 불과했던 까닭에 국교는 아니었으나 국교와 같은 기능을 제네바에서 수행했다. 따라서 네덜란드에 들어갔을 때 개혁교회로 재정리하여 벨지움과 홀란드의 국교로 채택되었고 그 후에 스코틀랜드로 들어가서 국교로 채택되어 교단 제도로 굳혀지게 되었다.

루터나 칼빈과 동시대에 종교개혁을 주도했던 개혁가들 중 쥬릭의 즈윙그리(1484-1531)는 빈번했던 전쟁에 군목으로 출전했다가 전사함으로 개혁 작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으나 즈윙그리의 개혁운동은 오늘날 스위스의 복음주의 교회를 형성하게 되었다.

같은 스위스 북방에 위치한 스트라우스버그에서 성공적으로 종교개혁을 주도했던 부서(1491-1551)의 개혁운동은 후에 침례교의 한 지류로 발전했다. 사이먼스(1492-1559)는 서부 독일 일대를 중심으로 종교개혁을 성공적으로 이끌었으나 루터교와 칼빈주의 자들의 박해로 온 세계에 흩어졌는데 시베리아, 미국, 캐나다 그리고 남미 등에서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는 평화주의자들이다.

그 외에 미국의 침례교인들이나 청교도 출신들 중 장로교회로 흡수되지 않고 미국의 동북부 뉴잉글랜드지방에 회중교회로 남아있는 모든 교회들은 독립교회주의자들이다. 따라서 온 세계에 흩어져있는 개신교인들의 교회 수나 교인수를 계산하면 교단교회에 비해 훨씬 많은 교회들이 독립교회로 존재하고 있다.

이 같이 개신교 보수 정통노선의 독립교회 운동이 한국에는 신복음주의 운동과 함께 최근에야 도입되어 성장하기 시작했다. 여러 가지 역사적인 이유를 분석할 수 있으나 독립교회 운동이란 한마디로 교회는 교단이 아니라 개교회라는 원리에 근거한 것이다.

따라서 신약성경의 교회론을 올바르게 정리하는 경우 신약성경에는 교단이란 없다. 개교회와 영적인 우주적인 교회가 있을 뿐이다. 개교회의 독립성은 성경의 원리대로 개교회가 가져야한다는 원리를 유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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