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한국사회와 교회를 말한다]강한변화vs무뎌진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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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한국사회와 교회를 말한다]강한변화vs무뎌진 영성
  • 윤영호
  • 승인 2006.03.17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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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의 엄위로운 권위를 조롱하듯 신자유주의는 교묘하게 경제 문화 정치계에 금속하게 파고들 것으로 보인다. 신자유주의 정책을 비난하는 시위대를 막는 경찰견과 경찰들.

 

세상을 향한 교회의 책무는 ‘하나님의 주권선포’를 골자로 하는 복음전도로 요약된다. 이같은 책무를 이행하기 위해 교회는 그동안 다양한 방법들을 동원해왔다.


구제와 나눔, 이웃사랑 실천의 다양한 형태들. 한국기독교100년의 역사는 바로 나눔을 실천하는 가운데 복음을 심는 ‘생활복음전도’였음을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최근에 나타나는 기독교의 복음실천은 부끄러운 지경에 도달했다. 교세확보가 그 목표이기 때문이다. 성장을 위해서 적용되는 다양한 기법은 세속적이어도 무방하고 더구나 세상기업이 성공한 방법이면 무차별 도용된다.

영성이 무뎌지는 이유다. 허약한 영성은 시대변화에 둔감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으로부터 멀어져 가는 변화들을 감지하지 못한다. 교회와 세상의 동반부패가 진행되는 원인이다.

기획시리즈 ‘21세기 한국사회와 교회’는 교묘하게 침투하는 반교회적 흐름들을 반성의 눈으로 보고자 한다. / 편집자 주



몰려오는 변화의 회오리에 교회 ‘묵묵부답’  

인간과 그 역사에 대한 궁금증은 엄청난 과학문명을 이룩한 현대사회에서도 계속되고 있다.  역사의 주체로서 인간은 과연 누구이며 무엇인지에 관한 질문은, 고대 철학의 중심 주제였을 뿐만 아니라 최첨단 기술의 행진을 거듭하는 현대사회의 중심주제이기도 하다. 성경의 중심주제 역시 인간은 바로 ‘무엇이다’라는 사실을 창조주의 계시를 통해 증거하고 있다.

이번 기획 시리즈 ‘교회와 세상’은 조직신학이 다루는 ‘인간론’을 다루지는 않을 것이다. 이번 기획시리즈에서는 변화무쌍한 교회 밖의 ‘심상찮은 환경변화’에 대한 교회의 올바른 응답에 대해 살펴볼 예정이다.

물론 교회의 응답은 진리의 척도인 ‘성경’의 범위를 넘지 않을 것이며, 응답 가운데는 보수측과 진보측 그리고 최근 각광을 받으며 기독교 역사의 한 축을 세우고 있는 복음주의계열을 포함할 예정이다.

우리는 최근 몇 년 동안 매우 어려운 상황에 직면해 있다. 신앙적인 판단을 유보시켜야 할 만큼 중대한 사건과 현실 속에서 제대로 된 답 제공을 회피하는 교회지도자들의 비굴한 모습만을 목격해왔다. 비근한 사례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흔들리는 현실과 교회의 방관
최근 벌어진 사건 가운데 ‘대광고 사태’는 우리를 매우 당혹스럽게 했다. 이 사건은 교회가 결국은 세상에 뿌리를 두고 세워진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라는 점을 매우 강하게 어필했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대광고 사태는 이렇다.

기독교학교인 대광고는 정기적으로 채플시간을 진행했다. 하지만 당시 재학생이었던 강의석 학생은 채플에 참석할 수 없다고 반발했다. 강군의 주장은 이러했다. “헌법이 보장한 신앙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를 침해받을 수 없다.”

강군의 주장은 자유민주주의인 우리나라에서는 지극히 당연한 생각이다. 특히 서울시가 고교평준화 정책을 실시하고 있어 자신의 선택권 없이 입학한 강군으로서는 대광고의 예배를 규정한 학칙보다는 상위법인 헌법에 소원한 것이다.

대광고는 “기독교학교 전통으로서 최초의 사건이며 절대 채플거부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며 강군의 거듭되는 시위에 결국 ‘퇴학’조치를 취했다.

당시 강군은 3학년으로, 대학진학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퇴학당한 강군은 시민단체의 지지와 성원에 힘입어 서울대 법학과에 입학하는 영광을 안았다. 일단 겉으로 보기에 기독교는 한 치의 양보없는 교만한 집단으로 비춰졌을 것이 분명하다.

대광고 사태는 세상의 법과 기독교 법 사이에서 갈등하는 한 인간의 고민을 완곡하게 표출했다는 점에서 눈여겨봐야 한다. 우리는 이렇게 세상의 삶과 교회의 삶이라는 이중적인 영역 안에서 매일매일 고민하며 “하나님을 기쁘게 하랴 사람을 기쁘게 하랴”는 사도 바울의 외침을 되 뇌이곤 하는 것이다.

소수자 인권으로 침략하는 동성애
다음은 ‘동성애문제’다. 최근에야 우리나라에서 사회문제로 대두된 동성애는 사실 외국에서는 이미 여러 해 동안 논쟁이 진행됐다. 그 결론은 모르지만 외국의 일부 개신교가 동성애자를 성직자로 인준한 것을 보면 동성애에 대한 기독교의 입장이 정리된 것으로 보인다.

기독교의 동성애에 대한 긍정적인 입장은, 사회적 소수자로서 꼭 보호받아야 한다는 사회인권 단체의 압력이 상당부분 작용한 것으로 분석된다.

소위 시민운동이 정착된 외국의 이같은 사례는 현재 시민운동이 활성화되고 있는 우리나라 추세에서 얼마 지나지 않아 공식적으로 허용할 것 같은 분위기여서 소름이 돋는다.

이를 증명이나 하는 듯 대중매체 속에서 드러나는 동성애지지 입장은, 각종 광고와 영화, 드라마 등에서 무차별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교회는 이같은 상황을 어떻게 반전시킬 수 있을지 아직까지 무반응이다.

경제양극화 물신주의 예고하는 신자유주의
좀 무거운 주제로는, 신자유주의를 표방하는 ‘세계화’를 들 수 있다.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에 의해 추진되는 세계화정책은 이미 전 세계적으로 합의된 사안이지만 이 정책이 몰고 올 각종 폐해와 변화들을 예상할 때 교회가 꼭 이 정책을 수렴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생기게 된다.

관세철폐로 인한 우리나라 상품시장의 전멸, 대량 생산시스템을 갖춘 외국의 농산물에 밀려 몰락하게 될 우리나라 농촌, 다국적 기업의 물량공세에 밀려 파산할 중소기업 등등. 교회성장과 건축에 바쁜 한국교회의 정서를 생각해 볼 때 세계화가 몰고 올 이같은 파장은 교회성장 위축과 헌금수입 급감으로 이어져 파산하는 교회가 늘어갈 것이라는 절망적인 예측도 가능하다.

하지만 교회입장에서는 세계화 때문에 유입 될 각 나라들의 비기독교적 문화가 사실 더 큰 문제이다. 체계적인 시스템으로 관리되는 상업성 짙은 문화유입이 우리나라 교인들을 얼마나 성경으로부터 떼어 놓을지 생각해 볼 일이다.

스크린쿼터제 축소와 폐지를 촉구하는 강대국의 입장은 교회적으로 생각하면 다양성을 가장한 비기독교 상업영화의 자유로운 상영을 촉구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하지만 교회는 이에 대해 아무런 준비없이 수수방관하는 상황이다.

특히 미국 복음주의 대형교회들의 목회스타일을 벤치마킹하는 우리나라 교회들의 현 추세를 전제할 때, 세계화정책은 앞으로 한국교회의 목회스타일을 한층 빠르게 서구식으로 바꿔나갈 충분한 가능성을 배태하고 있는 것이다.

폭력에 관대해지는 교회의 엉성한 판단력
최근에 교회 안에서 촉발된 가장 심각한 사안 중 하나는, 미국의 이라크 공격에 대한 것이었다. 인권을 유린한 나쁜 대통령은 제거돼야 한다는 미국의 판단을 일부교회는 지지하고 다른 일부는 비난하고 있는데서 우리는 또 다시 삶과 신앙의 괴리감을 느낀다. 기독교와 이슬람의 충돌로 비화되는 상황에서 기독교는 또 한 번 그 호전성을 드러냈다는 비난마저 받고 있지만 백악관은 그 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삼각하게 되새길 문제는, 부시 정부의 이같은 정책의 뿌리에 자리잡고 있는 세력이 신실한 기독교도란 점이다.

복음주의권에 속한 이들 기독교도는 백악관 정책에 도움을 줄 만한 각종 자문역을 해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는 세상으로부터 비난받는 정책의 한 부분을 교회가 차지하고 있음을 드러내준 사례이다.

기획시리즈 ‘21세기 한국사회와 교회’는 이중적인 판단잣대로 살아가는데 익숙한 우리 신앙인들의 비뚤어진 습관을 드러내고 교정하는데 도움을 줄 것으로 보인다. 특히 급격한 변화 가운데 무뎌진 영성이 몰고 올 파국을 예상하며 교회의 공동전선 형성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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