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줄 아는 것이 오직 기도밖에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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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줄 아는 것이 오직 기도밖에 없었습니다”
  • 현승미
  • 승인 2006.03.02 11: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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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그맨에서 장애인 사역자로 새롭게 거듭난 김 정 식 전도사

최근 몇 년 연예계에서 진행되는 각종 연말 시상식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수상소감을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방송인들이 공공연히 크리스천임을 밝히며 모범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매우 반가운 일이다.


유명 연예인들이 개교회의 부흥집회나 대형행사에 참석해 간증을 하는 사례도 더 이상 특이할만한 일이 아니다. 최근에는 연기자 임동진장로가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목회와 연예활동을 병행하겠다는 의사를 밝혀 언론과 사람들의 관심을 받으며 긍정적인 반응을 얻고 있다.


그러나 이보다 한발 더 나아가 연예계 생활을 정리하고 온전히 하나님사역을 꿈꾸는 이가 있다. 이름보다 ‘슈퍼 홍길동’, ‘밥풀떼기’로 더 잘 알려진 개그맨 김정식.

이제 그는 더 이상 개그맨이 아니다. 아니 스스로 개그맨으로 불리길 원하지 않는다. 장애인을 위한 인터넷 방송 ‘사랑의 소리’ 방송본부장 김정식 전도사. 그가 하나님을 만나고 새롭게 부여받은 타이틀이다.


그러나 그를 만나기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쉽지 않다. 아니 오히려 연예인 시절보다 더 어려워졌다. 몇 번의 전화통화 끝에 그를 만나러 간 곳은 장애우들을 위해 마련된 강남의 밀알학교.


밀알학교 내부에 위치한 세라믹홀에 들어서니 뒤쪽으로 이어폰을 끼고 잠시 후 진행될 행사 리허설 준비에 여념이 없는 김정식 전도사를 발견했다. 그런데 그의 모습에서 그 시절의 장난기는 찾아 볼 수 없었다. 이것저것 주변상황을 살피며 지시를 하는 모습이 사뭇 진지했다.


바쁜 와중에 눈인사를 건넨 그는 몇 가지를 더 살펴본 후 가까이 다가왔다. 얼굴의 주름이 세월의 흐름을 짐작하게 할 뿐 분명 어릴 적 TV에서 보던 ‘밥풀떼기 김정식’의 모습이었다. 인사를 건네는 그의 모습에서 이내 웃음기 가득한 과거의 그를 발견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장애인사역에 대해 묻자 그는 첫 만남보다 더 진지한 모습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장애인들은 신체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제약이 많기 때문에 우리 비장애인들처럼 문화생활을 즐긴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장애인들이 인터넷을 통해 즐길 수 있도록 음악콘서트나 연극 공연 등을 카메라에 담아내는 일이 제가 하는 일입니다.”


처음 장애인들을 돕고싶다는 순수한 마음에 무작정 자비량으로 뛰어들어 장애인 사역을 하면서 생각하지 못했던 경제적 어려움도 많이 겪어야했지만 정작 힘들었던 건 장애인들에 대해 너무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미국에서 신학과 상담학을 공부했지만, 그는 다시 대불대에서 사회복지학을 공부했다. 최근 장애인에 대한 시각이 많이 변해 선뜻 돕고 싶다는 뜻을 밝히는 이들도 있었지만 정작 전문가들은 많이 부족한 실정이라며 안타까워하는 김정식 전도사.


목회자가 되기보다는 앞으로도 희귀병 어린이들을 위한 무균 놀이방, 무균 어린이시설을 만들어 아이들부터 노인들까지 장애인을 위한 사역을 감당하고 싶었던 그에게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특별한 만남이 있었다.


“장애인을 위한 사역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지는 벌써 15년이 되갑니다. 지인의 부탁으로 농아인들을 위한 홍보동영상을 찍게 됐는데, 그들의 소외감과 절망감을 조금 이해하게 됐습니다. 그때 이미 하나님께서 제가 해야 할 일을 예비해 두신 것 같아요.”


80년대 홀어머니의 약값을 벌기 위해 방송계에 뛰어들었던 그는 마음 한편에는 가난과 아픈 어머니를 담아두고 밖으로는 시청자들에게 웃음을 선사하며 힘겹게 스타반열에 올라섰다.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고 무대 위에서 구르고 뛰며, 남들과는 다른 색다른 모습의 개그를 보여줬던 그에게 사람들은 점점 더 빠져들게 되었던 것이다.


군 제대 후 한때 슬럼프를 겪기도 했지만 어린이를 상대로 하는 프로그램 ‘꺼꾸리와 장다리 만세’를 통해 다시 제2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꼬마신랑’, ‘도시의 천사들’, ‘동작 그만’ 등 당시 내로나 하는 개그맨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1989년과 1991년 백상예술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80년대 김정식은 개그계를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고, 90년대 초반 그의 인기는 꾸준한 상승세를 보였다.


다행히 집안형편은 조금씩 나아졌으나, 인기가 올라갈수록 그는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 당시는 정말 눈앞에 무서울 게 없었지요. 사람들에게 매일 큰소리치며 점점 더 기고만장해졌지만, 그 뒤에 느껴지는 허무감을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지요.”

결국 그는 모든 인기를 뒤로한 채 도미를 결정했다. 무작정 집에 있던 아내에게 당장 필요한 옷 몇 가지만 챙겨달라고 부탁한 그는 아무런 준비도 없이 미국으로 떠났다.


그는 미국에 가기 얼마 전부터 아내의 기도로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지만, 그저 주일예배나 참석하는 선데이크리스천이었다.


“사실 저희 집은 어릴 적부터 철저한 불교집안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저희에게 교회는커녕 성경책조차 보지 못하게 교육시키셨고, 저도 당연히 교회와는 인연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내의 기도 때문이었는지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이루어졌지요. 그렇게 반대하던 어머니가 오히려 먼저 교회에 다니지 않겠느냐고 묻더군요.”


어머니의 말을 듣고 묘한 이끌림에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지만, 특별한 감동이나 은혜를 받지는 못했다. 갑작스런 미국행도 오직 자신이 행한 일이었지 준비된 하나님의 역사였음을 알지 못했다.


“무작정 작은 짐 하나를 들고 미국 땅에 내렸을 땐 후회스럽기도 하고 막막했지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모든 일이 순조로웠습니다. 그 넓은 미국 땅에서 우연히 한국교회의 담임목사님이 말씀해주셨던 교회 가까이에 자리를 잡게 된 것도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우연히 기도원에서 기도하던 중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됐다. 3일 밤낮으로 기도하는 중 묘한 목소리가 그를 붙드는 경험을 하게 됐다. 처음에는 두려움에 피하려 했지만 그는 이내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게 됐다.


이후 그는 하나님께 서원한 대로 대중의 인기 보다는 하나님의 일을 중요시하는 진정한 크리스천으로 변화됐다. 미국 뉴욕성서교회에서 상담교육을 받고 초신자를 위한 신앙상담을 하면서 신앙의 깊이를 느낄 수 있었고 봉사활동을 하며 주님이 주시는 사역을 찾고 또 찾았다. 미국에서 상담 공부를 마치고 국내에 들어온 그는 15년 전 하나님이 예비해두셨던 장애인 사역을 위한 인터넷방송 ‘사랑의 소리’ 본부장으로 뛰기 시작했다.


“장애인 방송을 사랑합니다. 자막기 자동송출장치 등 방송 장비도 준비 안 되는 등 많이 부족하고 어려운 환경이지만 하나님이 제게 주시는 사역으로 알고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장애인을 위한 인터넷방송 ‘사랑의 소리’에서 무료로 봉사하는 그는 작업이 밀리는 날이면 밤을 꼬박 새우기 일쑤지만 힘들다는 내색도 하지 않고 장애인 사역을 묵묵히 감당하고 있다.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 아는 것이 없어 오직 기도할 수 없었다고 고백하는 김정식 전도사. 운전할 때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이동할 때, 언제든지 혼자만의 시간을 갖게되면 형식도 모른채 오직 하나님과 대화했다는 그의 기도가 장애인 사역으로 빛을 발할 것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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