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적 팽창에 우선순위가 아닌 갱신을 통한 부흥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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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적 팽창에 우선순위가 아닌 갱신을 통한 부흥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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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5.12.28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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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각성운동으로 본 회개운동의 올바른 방향?

임희국 교수<장신대학교 교회사>
  

1907년 평양의 대 각성운동은 1월에서 4월까지 지속적으로 일어났다. 이 대 각성운동은 한 해전(1906년) 8월의 선교사 모임에서 촉발됐고, 평양 대 각성운동은 하디를 통하여 원산의 부흥운동과 직접 연결되고 있으며 그 이후에 계속 일어난 신앙각성운동의 절정이었다. 그 후 평양의 신앙각성운동은 계속 여러 도시와 지역으로 파급되었고 더 나아가서 중국으로 확산되었다.

첫째, 신앙각성운동이 일어나게 된 역사적 배경에는 ‘위기 상황에서 찾아오는 불안심리’가 짙게 깔려 있었다. 구한말 위기상황에 처해 있는 한국에는 사회 전반적으로 불안감이 조성되었고, 선교사들 역시 그들의 불안감이 있었다.

둘째, 최소한 감리교회와 장로교회 선교사들의 상호 협력 속에서 이 신앙운동이 지속적으로 일어났다. 이 점은 초창기 한국 개신교 역사에서 ‘신앙각성운동과 에큐메니컬운동의 연계’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가 될 것이다.

셋째, 성령의 역사를 통한 죄 고백은 ‘통전적 신앙’(머리-가슴-삶)이 형성되게 하였다. 이러한 신앙형태는 한국적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자리잡았다고 본다.

넷째, 죄 고백을 통한 삶의 변화는 영적, 지적, 윤리 도덕적 갱신이었다. 이 갱신은 사경회에서 성경을 배운 바탕 위에서 여물어졌고 또 이를 통하여 교회가 부흥되게 하였다.

이 경우의 부흥이란 수적인 증가와 양적인 팽창에 우선순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하심 속에서 복음의 능력으로 거듭나고 변화되어 이 복음을 이웃에게 증언하면서 저절로 교인 수가 증가되는 열매였다. 즉, 갱신을 통한 부흥이었다.

이처럼 1907년 평양의 사경회 기간에 나타난 성령의 역사는 초창기 한국 개신교의 역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사건이었다고 본다. 신약성경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오순절 성령의 역사가 1907년 평양에서 다시 일어난 사건은, 그 때의 예루살렘과 지금의 평양이 성령 안에서 하나의 띠로 엮어지는 사건이라 해석할 수 있다.

이로써, 한국 개신교의 역사는 신학적으로 성령역사의 관점에서 파악하고 정리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것은 고대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서양의 헬라지역에 복음전파가 뿌리를 내리던 과정과 대비되는 점인데, 그 때의 그 곳에는 기독론을 중심으로 한 삼위일체 교리가 확립되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신앙각성운동기간에 성령의 역사가 개신교 역사의 첫 단추를 채웠다고 파악되는데, 이 점에 착안하여 성령론 중심의 한국적 신학을 정립할 수 있다고 본다. 

20세기 초반 한국의 신앙각성운동은 미국의 19세기 신앙각성운동과 ‘역사적으로’ 연계되어 있다. 또한 미국의 이 운동은 그 당시 유럽 전역에서 일어난 신앙각성운동과 ‘역사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리하여 서양 근세 개신교의 역사와 한국 개신교의 역사는 신앙각성운동을 통해 ‘직접’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역사적 연결을 바탕으로 신앙각성운동을 신학적으로도 정리해 볼 수 있다고 본다. 신학적 작업을 통하여 우리는 한국과 서양의 신앙각성운동에서 그 공통점이 무엇이며 차이점도 무엇인지 파악할 수 있다. 신학적 공통점을 통하여 세계 개신교의 ‘보편성’이 파악될 것이고 또 신학적 차이점을 통하여 한국 개신교의 ‘특성’이 파악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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