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명을 지킨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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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명을 지킨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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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5.12.07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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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엽 목사<반도중앙교회>


성경의 전체적인 맥락에서 볼 때 인간의 부류를 3가지 측면에서 이해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방인, 유대인, 기독교인. 이방인은 하나님을 이해 할 수도 없고 하려고도 않고 알고 싶지도 않고 현실에서 본능을 위주로 살고 싶으며 또 그렇게 삶으로써 윤리와 도덕은 생각지도 않고 할 필요성을 느끼지도 않고 사는 그런 부류의 사람을 가리킨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어떻든 하나님의 계명을 생명 같이 여기면서 이마에 대고 팔에 감고 다니면서 외우며 행하기를 힘쓰고 하루에 3번씩 성전을 향하여 기도 하는 완전히 종교적 인간을 가리킨다.

그러면 기독교인들은 어떠한가? 진솔하게 말한다면 이런 엄격한 유대인들의 전통 위에 속죄의 관문을 통과하여 성령님의 내주의 능력을 통하여 계명을 지키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이것이 기독인의 근본적인 삶이며 이런 전제 위에 성경은 말씀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계명에 대한 생명적 준수의 전통이 그리스도의 구원의 법을 따르는데 걸림돌이 되는 것인데 이방인들의 경우는 어떠한가? 유대인의 전통적 엄격성도 결여 한 채 복음을 받아 드리는 것이다. 자칫하면 우리는 믿음이라고 하는 미명 아래 계명 준수의 철저성을 등한히 하기 쉬운 입장인 것이다.

우리는 신구약의 모든 입장에서 볼 때 계명의 철저준수는 어느 경우에도 양보 할 수 없는 기본적 철칙이다. 어느 경우에는 다시 율법주의에 빠지는 것이 아니냐는 논란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바울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리스도의 율법주의(고전 9:21)라고 하는 말로 이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 우리는 왜 이렇게 그리스도의 계명 지키기를 강조 하여야 하는가?

요한복음 14:21, 23-24의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기본으로 두고자 하기 때문이다. 실제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기독교 신앙은 절대 이론이 아니고 삶 자체라는 것. 생적 관계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 신학교는 말 할 것도 없고 교회에서조차 기독교의 이론을 강론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론을 가르치면 자신들이 알아서 지키리라고 생각 한다면 오산이다. 교인들은 듣고 아는 것으로 만족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또 다시 지킬 것(실천)을 따로 강조 하여야 하는 것이 오늘날 교회의 형편이다.


여기까지 오면 오늘날의 교회가 왜 이렇게 형식과 외식에 빠지게 되고 사회의 지탄을 받는데까지 오게 되었는가를 이해 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마태복음 7장에서는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 하신다.

모든 율법주의적 외식신앙, 모든 권능을 행했던 능력주의 신앙을 향하여 전혀 알지 못하는 자들이라고 단호하게 말씀 하신다. 스스로 말씀을 생명같이 지킨다고 하는 말씀주의 신앙들! 스스로 은혜가 충만하여 하나님과 동행 한다고 믿는 짝사랑 신앙들! 그리스도께 모른다고 퇴박을 맞지 않을지를 다시 한번 점검을 해 보아야 한다.

우리의 현재의 노력하는 모든 신앙적 지향점은 과연 어디인가? 우리는 사회(기독교사회)가 그렇게 우리를 만든다고- 기독교적 사회환경이 그렇게 강요한다고 변명을 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비 그리스도적 입장에서 안주하고 자기 만족에 빠져서 육신의 욕심을 모르는 척 누려야 하겠는가? 언제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심장을 잊지 말아야, 잃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탄식 하시며 다시 한번 눈물을 흘리시지 않도록 배려하고 또 배려하여야 한다.

너나 할 것 없이 빠지기 쉬운 이 늪! 이런 바탕 위에서 행동을 한다면 오늘날 지도급에 있는 모든 이들이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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