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 감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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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 감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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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5.11.23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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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배 목사<기장 선교교육원장>


11월 셋째주일은 대부분의 한국교회가 서구교회로부터 물려받은 전통에 따라 추수감사절로 지키고 있다.


그러므로 매해 이 맘 때가 되면 기독교신앙의 핵심중의 핵심인 감사의 의미를 되뇌이게 된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감사로부터 출발한다.

감사는 하나님께서 과거에 우리 삶 가운데 베푸신 구원과 사랑의 행적에 대한 찬양과 영광돌림이다. 감사하는 자가 서있는 삶의 자리는 현재이다. 현재의 자리에서 과거를 감사하는 자의 삶 가운데 있었던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을 감사하는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와 같은 감사의 행위는 미래의 지평을 열어 제치는 힘을 그 자체 안에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신앙의 비밀을 깨달은 바울 사도는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6-18)라고 설파하였다.


칼 마르크스는 이와 같은 그리스도인들의 세계관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문제를 제기 하였다. 그는 그가 품고 있는 사상을 전개한 파리의 초기 저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자기 발로 설 때에야 하나의 존재는 스스로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존재함에 대해 스스로 감사할 때에야 자기 발로 설 수 있다. 다른 사람의 덕택으로 사는 사람은 자신을 종속적인 존재로 간주한다… 이 생명이 나의 고유한 창조물이 아니라면, 나는 전적으로 다른 사람 덕택으로 사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그리스도교가 지향하는 은혜로부터 오는 인간 삶의 가능성과 구원에 대한 강조를 ‘아편’적인 것으로 의심을 한다. 이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은혜만을 신뢰하고 세계를 변화시키는 일에 무관심하다고 말한다. 그리스도교 신앙전통은 신앙을 그처럼 잘못 이해하는 것을 강력하게 변호한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은 결코 이 세계에 대해 무관심 한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이 말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는 이 세상은 하나님의 영광의 무대인바 인간은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창조적이고 책임적인 존재로 부름 받았다는 것이다.

‘오직 은혜로만’ 감사하는 삶을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노동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인간의 업적과 성취를 무시한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이와는 반대로 은혜 안에서 이루어지는 감사의 삶은 인간의 책임의 능력을 활성화시킨다.


노동은 인간의 권리이다. 그러나 사회주의자들의 주장처럼 그것으로부터 인간이 의로워지는 것은 아니다. 인간 삶에 대한 마지막이요 결정적인 판결인 의인화는 인간들이 성취한 업적들로부터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은혜로부터 온다.

우리들이 살고 있는 세상은 동서를 막론하고 인간들의 업적을 중요시 여기는 문화가 지배하고 있다. 이와 같은 문화가 지배하고 있는 세상 속에서는 성취능력이 없는 사람들은 역사의 중심으로부터 끊임없이 밀려날 수밖에 없다. 

인간이 오로지 그들이 이룩한 업적을 근거로 평가된다면 이는 참된 인간성의 곡해이며 위협이다. 은혜로부터 오는 의인화의 복음은 그와 같은 뒤틀림으로부터 우리를 방어해준다. 인간은 그가 이룩한 업적의 총체와 비교될 수 없는 그 이상의 존재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더 나아가 동시대인들과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그가 성취한 것 안에서 결코 소멸될 수 없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어떤 인간도 단순히 타인을 위해서 계산되어질 수 없는 존재이다. 은혜로부터 오는 의인화에 대한 믿음 안에 양도할 수 없는 권리와 하나님의 자녀의 자유가 근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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