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적 선교
상태바
성경적 선교
  • 운영자
  • 승인 2005.11.16 14:0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명혁 목사<강변교회>

예수님은 하늘 영광을 떠나 인간들이 사는 세상으로 오신 최초의 선교사이다. 그러므로 하늘 영광을 버리시고 세상에 오셔서 사람이 되신 ‘예수님의 선교’ 즉 ‘성육의 선교’가 성경적 선교라고 하겠다.

‘성육의 선교’를 본받아 성육적 선교를 한 사도 바울의 선교의 특징은 21세기 선교를 소망하는 교회들에게 많은 시사점을 준다.

첫째, 성육의 선교는 ‘되는’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선교는 사람이 되는 것이고 삶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머물지 않고 사람이 되셨고 삶이 되셨다. 선교는 영국 사람이나 미국 사람이 한국 사람이나 중국 사람이 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자기의 선교 방식을 설명하면서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과 같이 되는 것이고,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되는 것이고, 율법 없는 자들에게는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되는 것이고, 약한 자들에게는 약한 자와 같이 되는 것이고, 여러 사람에게는 여러 모양이 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고전9:20-22). 따라서 선교는 되는 것이며 말이 아닌 삶이 되는 것이다.

둘째, 성육의 선교는 ‘거하는’ 것이다.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주님이 보여주신 선교가 ‘거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거한다는 것은 함께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천막을 치고 함께 산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삼십년 동안 사람들과 함께 살았다. 기쁨과 즐거움과 슬픔과 아픔을 서로 나누면서 함께 사는 것이 ‘성육적’ 선교인 것이다. 

셋째, 성육의 선교는 ‘은혜가 충만한’ 것이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주님이 보여주신 선교가 ‘은혜가 충만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진리가 매우 중요하지만 은혜가 없는 진리는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한다.

사람을 죽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선교는 은혜를 충만하게 베푸는 것이다. 즉 착함과 관용과 사랑을 충만하게 베푸는 것이다.

넷째, 성육의 선교는 ‘하나님 나라’ 선포이다.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왔다 하라”(마10:7). 주님이 분부하신 선교가 ‘하나님 나라’ 선포였기 때문이다. 선교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종말’을 선포하는 것이다.

초대교회의 목회자들과 선교사들에게는 종말 의식이 충만했다. 그런데 오늘의 목회와 선교는 너무 그 초점을 현세적 정치 경제 문화 민족 등에 두고 있다는 생각이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도 제자들에게 선교 위임령을 부여하시면서 ‘민족’이나 ‘나라’의 회복에 관심을 두지 말고, 오직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두고 구름 타고 다시 오실 주님의 ‘재림’에 두라고 암시했다.

다섯째, 성육의 선교는 ‘치유’와 ‘구원’이다. 주님이 실천하시고 분부하신 선교가 ‘치유’와 ‘구원’의 선교였기 때문이다. 선교는 사람을 살리는 구원과 치유이다. 육체적으로 병든 자들을 치유하고 영적으로 죽은 자들을 살리는 것이 선교의 본질이다.

민족주의와 종교주의적 갈등과 대결이 극심해지는 21세기의 선교야말로 말을 전하는 것보다는 사람을 고치고 살리는 치유와 구원을 베푸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여섯째, 성육의 선교는 ‘동반자적 협력’이다. 성육의 사건 자체가 성부, 성자, 성령의 협력적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주님이 보여주신 선교의 방식이 ‘동반자적 협력’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선교사로 보내실 때 열 둘 또는 칠십 인을 둘씩 짝을 지어 보내셨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들의 모든 사역의 최종적인 목적과 비전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데 두도록 혼신의 각오와 노력을 다하여야 할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