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청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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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청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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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5.10.19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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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하 감독

9월 각 교단마다 총회가 열리고, 한국 교회를 새롭게 이끌어갈 지도자들이 새로 선출되었다. 이번에 선임된 여러 지도자들은 우리 한국 기독교를 새롭게 하고, 하나 되게 하며, 크게 부흥시키는 주역들이 되라는 기대 속에 뽑힘 받았을 것이다. 

마틴 루터는 “그리스도인은 왕이며 동시에 종으로 부름 받았다”고 하였다. 특히 교회의 지도자된 이들은 하나님의 집에 청지기로 부름 받은 사람이란 자의식이 필요하다.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히 3:5)을 다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였듯이, 하나님께서 이 시대에 아직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과 오늘의 교회와 이 사회와 역사까지 맡겨주셨다는 믿음이 그것이다.

따라서 먼저 지도자 된 이들은 무엇보다 주님의 청지기로서 바른 정체성을 가져야만 한다. 베드로 사도는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하고 있다.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벧전 4:9-10).

청지기는 한마디로 주인의 재산과 사람을 관리하는 존재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주인의 은총으로 사는 사람이며, 이 은총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좌우된다. 사실 청지기에게는 명예심이나 권리주장보다 의무와 충성이 더욱 소중한 법이다. 그러나 행여 우리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은 섬김과 헌신의 직분을 망각한 채 권위주의와 체면치례, “누가 더 높으냐”라는 영광의 자리경쟁에 마음이 더 팔려있지 않았던가 스스로 돌아봐야 한다. 

오늘 거룩한 교회가 신뢰를 잃고, 존엄을 상실한 것은 먼저 교회의 책임자요, 지도자 된 우리 자신의 잘못 때문이다. 교회가 겪는 위기와 혼란의 출발점은 무엇인가? 바로 청지기가 아닌 주인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교회의 타락은 하나님의 것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는 위험천만한 발상 때문에 비롯되었다.

우리가 지나온 발자취를 되돌아보면 자랑도 있지만, 허물도 못지않다. 지금 우리 교회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닮기보다, 멀리해야할 세상의 습속에 익숙해졌다. 여전히 우리는 겉만 의로움을 내세우는 죄인의 존재이며, 말로만 섬김을 강조해온 오만한 존재였다. 경건의 모양만 주장하되 경건한 생활을 게을리 한 부끄러운 신앙인이었다.

우리는 1903년 원산에서 일어난 하디 선교사의 회개 운동으로 돌아가야 한다. 당시 일제 식민지가 현실화 되던 암흑 같은 시기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가 연합하여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으로 불붙었듯이, 이제 한국 기독교가 한마음이 되어 초대 교회의 정신을 회복하고 이 시대에 어울리는 일대 부흥의 전기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소망하는 것은 한국교회가 복음주의를 경쟁할 것이 아니라 ‘예수 사랑’을 경쟁하기를 바란다. 한국교회가 진보와 보수를 다툴 것이 아니라 ‘청지기 직분에 대한 충성도’를 다툴 수 있기를 바란다.

초대교회이래로 교회는 질적인 변화와 양적인 성장을 계속해왔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생명 있는 이의 특징을 지녔다. 각성하지 않으면 ‘화석화’된 교회가 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복음이 우주적이고, 보편적인 진리인 것을 믿으며 성령의 역사에 따라 ‘살아 움직이는 교회’여야 함을 분명히 명심해야 한다. 

이러한 변화의 중심에서 부름받은 지도자들은 먼저 희망을 주는 청지기가 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이 시대에 좌절한 사람들에게 희망의 증거자가 되고, 하나님 나라의 희망의 청지기 되길 진심으로 소망한다.


9월 각 교단마다 총회가 열리고, 한국 교회를 새롭게 이끌어갈 지도자들이 새로 선출되었다. 이번에 선임된 여러 지도자들은 우리 한국기독교를 새롭게 하고, 하나 되게 하며, 크게 부흥시키는 주역들이 되라는 기대 속에 뽑힘 받았을 것이다. 

마틴 루터는 “그리스도인은 왕이며 동시에 종으로 부름 받았다”고 하였다. 특히 교회의 지도자된 이들은 하나님의 집에 청지기로 부름 받은 사람이란 자의식이 필요하다.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히 3:5)을 다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였듯이, 하나님께서 이 시대에 아직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과 오늘의 교회와 이 사회와 역사까지 맡겨주셨다는 믿음이 그것이다.

따라서 먼저 지도자 된 이들은 무엇보다 주님의 청지기로서 바른 정체성을 가져야만 한다. 베드로 사도는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하고 있다.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벧전 4:9-10).

청지기는 한마디로 주인의 재산과 사람을 관리하는 존재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주인의 은총으로 사는 사람이며, 이 은총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좌우된다. 사실 청지기에게는 명예심이나 권리주장보다 의무와 충성이 더욱 소중한 법이다. 그러나 행여 우리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은 섬김과 헌신의 직분을 망각한 채 권위주의와 체면치례, “누가 더 높으냐”라는 영광의 자리경쟁에 마음이 더 팔려있지 않았던가 스스로 돌아봐야 한다. 

오늘 거룩한 교회가 신뢰를 잃고, 존엄을 상실한 것은 먼저 교회의 책임자요, 지도자 된 우리 자신의 잘못 때문이다. 교회가 겪는 위기와 혼란의 출발점은 무엇인가? 바로 청지기가 아닌 주인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교회의 타락은 하나님의 것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는 위험천만한 발상 때문에 비롯되었다.

우리가 지나온 발자취를 되돌아보면 자랑도 있지만, 허물도 못지않다. 지금 우리 교회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닮기보다, 멀리해야할 세상의 습속에 익숙해졌다. 여전히 우리는 겉만 의로움을 내세우는 죄인의 존재이며, 말로만 섬김을 강조해온 오만한 존재였다. 경건의 모양만 주장하되 경건한 생활을 게을리 한 부끄러운 신앙인이었다.

우리는 1903년 원산에서 일어난 하디 선교사의 회개 운동으로 돌아가야 한다. 당시 일제 식민지가 현실화 되던 암흑 같은 시기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가 연합하여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으로 불붙었듯이, 이제 한국 기독교가 한마음이 되어 초대 교회의 정신을 회복하고 이 시대에 어울리는 일대 부흥의 전기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소망하는 것은 한국교회가 복음주의를 경쟁할 것이 아니라 ‘예수 사랑’을 경쟁하기를 바란다. 한국교회가 진보와 보수를 다툴 것이 아니라 ‘청지기 직분에 대한 충성도’를 다툴 수 있기를 바란다.

초대교회이래로 교회는 질적인 변화와 양적인 성장을 계속해왔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생명 있는 이의 특징을 지녔다. 각성하지 않으면 ‘화석화’된 교회가 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복음이 우주적이고, 보편적인 진리인 것을 믿으며 성령의 역사에 따라 ‘살아 움직이는 교회’여야 함을 분명히 명심해야 한다. 

이러한 변화의 중심에서 부름받은 지도자들은 먼저 희망을 주는 청지기가 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이 시대에 좌절한 사람들에게 희망의 증거자가 되고, 하나님 나라의 희망의 청지기 되길 진심으로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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