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복음서(36) 베드로의 고백과 예수님의 수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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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복음서(36) 베드로의 고백과 예수님의 수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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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5.10.12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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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난, 구원의 역설적 진리
 

마태복음 16:13~20:34까지는 외형적으로 가이사랴 빌립보에서의 여론조사 후 시작되는 주님의 예루살렘으로의 여행을 기록하고 있지만, 내용적으로는 그리스도로서의 주님의 신분과 사명에 관한 매우 중요한 가르침을 담고 있다.

가이사랴 빌립보 사건은 복음서 전개에 있어서 분수령적인 사건이다. 이 사건 이후로 주님은 군중(무리)들을 상대로 한 치유 및 급식 기적 등의 행적을 접고, 예루살렘에 입성(入城)할 때까지 제자들을 상대로 한 교육에 집중하게 된다. 그리하여 이 기간 중 기적은 마태복음에서 두 사건만 발생한다(마 17:14~20 → 간질병자 소년의 치유, 20:29~34 → 두 소경의 치유).

그러면 과연 제자들에게 행한 교육의 내용은 무엇인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먼저 주님은 여태껏 이스라엘 가운데 행한 자신의 행적과 가르침을 근거로 하여, 군중들의 여론을 묻는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마 16:13). 이에 대해 제자들이 세례 요한, 엘리야, 예레미야 등으로 답하자, 다음으로 주님의 제자들인 그들이 주님에 대하여 무엇이라 생각하는지를 묻는다(15절). 그러자 그 유명한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나온다(16절,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그런데 과연 베드로는 자신의 이 고백의 진정한 의미를 바르게 알고 있었을까? 만일 알았더라면, 아마도 그는 주님이 자신의 신분과 사명에 대하여 예언한 21절을 듣고 나서 주님을 그토록 책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책망하였다는 것은 아직 한 가지 깨닫지 못한 부분이 있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렇다고 16절의 고백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아니다. 그 고백은 인류의 구원이 그리스도인 예수님에게 달려있다는 견지에서 단연코 옳다. 그러나 베드로에게 부족하였던 깨달음은 주님이 그 구원을 가져오는 방법이었는데, 그것은 십자가, 즉 고난을 통한 방법이었던 것이다.

사실 유대인들에게 메시야의 고난은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부분이었다. 그들에게 있어 메시야는 다윗 왕과도 같은 왕 같은 존재로서(마 1:1, 2:2),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할 인물인데(행 1:6), 그 메시야가 사람들에게 넘겨져 고난을 받고 마침내 죽는다고 하는 것은 전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지금도 메시야의 수난을 예언하고 있는 이사야 53장을 메시야와 연결하여 이해하지 않고, 오히려 이스라엘 민족의 운명과 결부하여 해석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베드로의 이 신앙고백 후 비로소 메시야로서의 자신의 신분과 함께 장차 당해야 할 운명이자 사명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는데,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수난이다(21절). 그리고 이 수난예언은 예루살렘 성에 이를 때까지 두 번 더 반복되어 모두 세 번에 걸쳐 강조된다(17:22~23, 20:17~19).

예수님은 메시야이기 때문에 우리를 위하여 죽으셔야만 했고, 그가 죽음으로 우리는 살게 되었다. 이것이 구원의 역설적 진리인 것이다.          


/교수·천안대 기독신학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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