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사형 대신 ‘새로운 기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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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사형 대신 ‘새로운 기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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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5.09.29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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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제도 폐지’ 과연 성경적으로 옳은 것인가?



정종훈 교수<연세대학교>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성서는 신앙의 출발이자 삶의 지침이다. 우리는 성서 없이 기독교 신앙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성서는 기록되던 당시의 시대를 반영할 뿐 아니라, 인간적 오류도 담고 있고, 자기모순적인 내용도 담고 있다. 그러므로 성서의 문자적 적용은 아전인수일 수 있고, 생명과 관련해서는 위험할 수도 있다.


오늘 이 시대가 제기한 문제들을 성서의 근본정신,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의 관점에서 조명하고 판단하며 실천하게 하는 과제를 감당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시지 않으시며(겔 18:23), 죽을 죄인이라도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을 기뻐하신다(눅 15:11-32). 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몇몇 구절을 문자적으로 적용하고자 사형제도를 주장하는 것은 나무 몇 그루를 숲 전체라고 주장하는 오류와 같다.

첫째로, 구약성서에서 말하는 사형에 해당되는 죄를 오늘 이 시대에 그대로 적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구약성서를 보면 유괴하는 자(출 20:15), 부모를 구타하는 자(출 21:1, 레 20:9), 간음하는 자(레 20:10-15), 등에 대해 사형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 이 시대 어떤 국가도 이러한 사람들에 대해 실제 사형하지는 않는다. 성서의 어떤 내용은 성서에 언급되어 있으니 실행해야 한다고 하고, 어떤 것은 지나친 것이니 실행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는 상황 자체가 성서의 문자적인 적용이 오류일 수밖에 없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둘째로, 신약성서에서 예수께서는 현장에서 간음한 여인에 대해 돌로 쳐서 사형하기보다는 그녀의 간음을 최종적으로 정죄하지 않으셨고, 다시는 동일한 죄를 반복하지 말 것을 당부하시며 새로운 삶의 기회를 제공하셨기 때문이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요 8:11)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는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마 18:22)고 가르치셨고, 당신 스스로는 자신을 죽이는 자들을 위해 용서를 간구하기까지 하셨다(눅 23:34). 우리는 사형제도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사형제도를 지지할 수 있는 몇몇 구절들에 대해서는 집착하면서도, 왜 사형제도를 폐지할 수 있는 성서의 근본정신과 그 근거가 되는 많은 구절들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외면하는지 이해하기가 어렵다.

기독교인들이 신앙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을 위해 자신을 죽이신 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막힌 담을 허무시고 진정한 화해를 도모하신 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의 현실에도 불구하고 죄인을 용서하신 분이시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 삶의 모델로 삼아 작은 예수로 살아야 하는 기독교인은 죄인을 용납하시고 죄인을 위해 스스로를 죽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면서 사형제도의 폐지를 주장해야 할 것이다.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형을 용인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앞에서 언급한 바 있는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은 당대의 관습법에 의하면 돌에 맞아 죽어 마땅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여인에 대한 죽임을 허용하지 않으셨다.

둘째로, 용서를 받고 새로운 존재로 살고 있는 기독교인은 스스로를 희생할지언정 다른 사람을 희생시킬 수 없고, 그녀가 흉악범이라 할지라도 정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기독교인은 자신을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고 고백한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은 흉악범으로 인해서 야기된 사회적인 긴장과 갈등, 증오와 폭력을 가속화하기보다는 예수의 길을 채택함으로써 진정한 용서와 평화를 만드는 화해의 사도로 우뚝 서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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