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속 인물 : 오병길 1897-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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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속 인물 : 오병길 1897-1950
  • 윤영호
  • 승인 2005.01.12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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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예배 드리다가 순교
 

교회사 속 인물 : 오병길<1897-1950>

지하실서 예배드리다 발각돼 처참 순교


동학농민전쟁의 상처가 채 아물기 전인 1897년, 전남 고창에서는 선교사가 전해 준 복음의 작은 씨앗이 서서히 자라나고 있었다. 동학군의 참패와 점점 커져가는 외세의 간섭 등 나라는 어수선한 시기였다.


이런 때 고창군의 오씨 일가는 다른 주민들과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다. 나라가 어려울수록 살길을 찾는데 더 노력해야 한다는 생각이 그것이 오씨일가의 생각이었다. 이 마을의 오창언, 오병희, 오윤팔, 오동근 등이 당시 이아락 선교사와 함께 교회를 세웠다. 이 시기 오병길은 오씨일가의 이같은 분위기에 싸여 자연스럽게 교회에 나올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오병길은 머리가 총명하여 이아락 선교사가 가르쳐준 성경구절을 속속 암기했다. 모든 구절을 단숨에 암기하는 오병길을 보던 선교사는 인근 광주로 데려가 ‘광주숭일학교’에 입학시켜 체계적으로 공부하도록 했다고 한다.


어느덧 나이가 먹은 오병길은 성경학교를 졸업하고 전남 영광군의 야월리교회를 맡아 사역했다. 얼마못가서 야월리지역은 술 도박이 사라지는 일대 변화가 일어났다. 오병길의 열심이 빚은 엄청난 복음의 능력이었다. 이 야월리교회가 바로 6.25당시 65명의 순교자를 배출한 교회사에 빛나는 곳이다.


오 전도사는 고창 부안의 용산교회, 흥덕교회, 동호교회 등 연약한 교회만을 돌보다가 부흥하면 다시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전도자의 사명을 다했다. 그는 미숫가루를 가지고 다니면서 우물물에 타서 먹으며 허기진 배를 채우는 그야말로 전도자였다. 어려운 교인의 신세를 질까 스스로 얼마나 조심했을까 생각하면 현재의 안락함이 죄스럽기까지 하다.


그러던 중 발발한 6.25전쟁은 오병길과 그 아들을 순교자의 반열에 올린 사건이 되고 말았다. 사역하던 교회를 공산군에 빼앗긴 이후 이들은 오병길을 중심으로 오 전도사 집 부엌의 지하실에서 몰래 예배를 드리다가 발각됐다. 당시 공산당은 방바닥을 두드리며 숨어있던 사람들을 찾아내 인민재판을 통해 죽였다고 하니 오 전도사 역시 그같은 위기에 직면한 것이다.


공산군에 끌려나온 오 전도사와 그의 아들 3부자는 형식적인 재판을 받고 외세의 앞잡이요 이승만괴뢰정부의 앞잡이란 구호 속에서 죽창과 창에 여기저기 찔려 눈 뜨고는 차마 보지 못할 정도로 처참하게 죽었다고 전해진다. 신앙을 부인했으면 살았겠지만 그들은 오직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간직한 채 순교의 길을 선택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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