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속 인물 : 노병선 1871-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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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속 인물 : 노병선 1871-1941
  • 윤영호
  • 승인 2005.01.12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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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탄압 속 교육운동 주도
 


 

교회사 속 인물 : 노병선 <1871-1941><하>

신앙으로 일제탄압 견디며 교육운동 전개


선교사들이 왜 자신의 재산을 털어가며 그 어려운 전도를 하는데 헌신하는지 궁금증을 풀어준 변증서 ‘파혹진선론’은 노병선 선생을 주목하게 만든 서적이다. 기독교신앙에 대해 설명한 최초의 논증서이기 때문이다.


그는 정동교회 권사로서 감리교 초기 개척 전도인이면서 설교자로서 폭 넓은 활동을 한 것으로 기록에 남아 있다. 1899년 발행 대한크리스도인회보를 보면 성탄절을 맞아 교회당에 교인들을 모아놓고 설교한 뒤 선물을 나누어 주었다는 내용이 전해진다. 1902년 노선생은 아펜젤러 선교사와 함께 정동제일교회에 파송받아 사역하는 임무를 맡았다. 하지만 아펜젤러 선교사가 파송 다음 달 순직하게 돼 정동제일교회는 노병선 선생이 맡은 사역지가 됐다고 한다.


그는 이듬해인 1903년 스크랜튼 선교사의 조사로 남부지역을 돌아다니는 전도자로 교육운동을 주창하면서 사역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선교사들은 노병선 선생을 ‘교회와 학교에 유익한 협력자’로 불렀다고 한다. 마치 미성숙했던 마가요한이 나중에 신앙으로 우뚝서 바울로부터 “훌륭한 협력자”로 평가받았던 것과 비교될 만하다. 


노 선생은, 일제의 압박이 다가오면서 애국계몽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을사보호조약이 성사되자 이를 무효화할 것을 요구하며 대한문 앞에서 죽음을 각오한 탄원을 주도했으며 이후 일경의 탄압을 받았다. 그가 세운 ‘공옥학교’는 바로 민족이 위기 앞에 놓였을 때 설립된 교육기관으로, 상동청년 학원과 함께 민족독립운동의 둥지로 가득했다고 한다. 그는 일본인과 대화하지 않으려 일본말도 배우지 않았다고 했다. 부득불 대화할 경우, 영어로 했다고 전해진다. 그같은 이유에서인지 노선생은 ‘항일투사’로 불리고 있다.


일제말기 그는 일본의 탄압을 못이겨 경기도 능곡지역으로 이사했으며, 현재 능곡감리교회에 출석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창씨개명도 거부하면서 온 몸으로 항거하다가 70세의 나이로 일생을 마감했다. 단지 집 한 채만을 남긴 그의 재산은, 6.25전쟁이 일어나면서 인민군이 그의 집에 난입, 불을 질렀다고 한다. 노선생의 많은 집필기록은 이 때 불타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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