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을 자유롭게 선포할 그 날을 향한 소망을 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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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을 자유롭게 선포할 그 날을 향한 소망을 품고
  • 이인창 기자
  • 승인 2024.03.15 10: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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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기독교 140주년 기념 ‘선교사 열전’ ⑥ 조선에서 마지막까지, 헨리 거하드 아펜젤러 (하)

한국 감리교의 시초로 아펜젤러 선교사(Henry G. Appenzeller, 1858~1902)를 기억하는 성도들은 많지만, 그가 조선 땅에서 불의의 사고로 순직했다는 역사는 의외로 잘 모른다. 아펜젤러는 1902년 6월 11일 목포로 가는 배가 전북 군산시 어청도 앞바다에서 다른 배와 충돌한 후 침몰할 때 실종됐다. 행방불명된 18명 중 아펜젤러가 있었다. 일등석에 타고 있던 아펜젤러라면 충분히 30여 명 생존자에 들어갈 수 있을 상황이었다. 그래서 그가 누군가를 구조하기 위해 힘든 선택을 했을 것이라고 예측한다. 확인할 길 없는 추측이지만 그의 인품이라면 충분히 있을 만한 일이었다. 안타깝게도 그의 시신은 끝내 찾지 못했다. 

그러나 아펜젤러가 뿌린 복음의 씨앗은 30배, 60배, 100배, 아니 그 이상의 열매를 거두었다. 27세 청년 아펜젤러는 44세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지만, 조선 땅에서 그의 발자취는 큰 걸음이었다. 

하나의 복음을 위해서라면
“내가 가장 바라는 소원은 마을과 시내 곳곳에서 예수님을 전하는 것입니다. 복음이 자유롭게 선포되는 날은 아직 오지 않았지만 언젠간 오게 될 겁니다. 우리 기독 학생들이 이 나라 곳곳에 흩어져 넘쳐나게 되면 이 나라 전체에 좋은 영향력을 미치게 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배재학당이 문을 열고 학생들이 몰려오면서 우리나라 근대교육의 꽃도 활짝 피게 됐다. 아펜젤러는 교육 선교를 일찍부터 전개하면서, 구령의 열정으로 원초적인 전도사역에도 열심이었다. 아펜젤러는 조선에 들어와 여러 차례 가 지방을 순례하며 전도했다. 수천킬로미터를 순례하면서 그는 이미 중국에서 사역하던 선교사를 통해 이 땅에 복음이 전래 되어 있었고, 권서인들을 통해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들이 세례받기를 고대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조선 정부의 금교령에도 불구하고 그는 성도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아펜젤러는 사교적이었고 갈등을 좋아하지 않았다. 조선 사람들과 잘 어울렸을 뿐 아니라 다른 선교사들과도 함께 일할 줄 알았다. 언더우드 선교사와도 이북지역 선교 여행도 다녀왔다. 특히 아펜젤러는 효율적인 선교사역을 위해 장로교와 감리교 간 선교지역 분할에 합의했다. 아펜젤러는 “주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하나이며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연합시킨다”고 연설한 바 있다. 복음을 위해서라면 서로 양보할 줄 알아야 한다는 신념이 확고했다.

남녀차별 없는 벧엘 예배당
한국 감리교회의 출발점 벧엘 예배당(지금의 정동제일교회)에서는 세례를 받은 조선인들이 늘어갔다. 처음에는 영어로 기도하거나 설교하던 아펜젤러도 서툴지만 한국어로 말씀을 선포했다. 뉴욕 유니온신학교에는 아펜젤러의 당시 수첩이 보관되어 있다. 수첩에는 한국어 단어를 적고 매일 연습했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1887년에는 한옥으로 된 예배당을 구입했다.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이라는 한국 문화를 존중해 남녀를 구분해 예배를 드렸다. 여성이라고 배제하지 않았고, 같은 공간에서 예배드리도록 했으며 동일하게 세례와 성찬도 베풀었다. 벧엘 예배당에는 매주 여성들이 찾아와 복음을 들었다. 남녀가 같은 공간에서 함께한다는 것은 당시 조선 사회에서는 파격이었다. 아펜젤러가 남녀 간 차별을 무너뜨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셈이다.

한국교회에만 존재하는 ‘수요예배’의 기원을 벧엘 예배당에서 찾는 시도도 있다. 배재학당에서 예수를 믿게 된 조선 사람들이 예배당을 찾아오면서 출발했다는 것이다. 수요예배가 1907년 평양대부흥이 일어났을 때부터라는 주장, 초기 외국인 선교사들이 모여 시작된 주장도 있다.

계속 부흥하면서 벧엘예배당은 1895년 8월 7일 건축을 시작했다. 같은 해 9월 9일 정초식에는 조정 법무대신 서광범, 외무협판 윤치호 등이 참석할 정도로 주목받았다. 

아펜젤러 선교사는 1902년 6월 해상 선박사고로 순직했다. 사고 당시 가족들은 미국에 머물러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을 겪었지만, 아펜젤러 자녀들은 아버지의 대를 이어 조선을 사랑하고 헌신했다. 

90kg 몸무게가 60kg 될 정도로
조선말과 글을 배우기에도 힘겨웠을 텐데, 아펜젤러는 1890년 로스역 성경 개정판 ‘누가복음젼’, 1892년 ‘마태복음젼’을 출판했다. 1893년에는 5명의 선교사들과 성경번역자회를 구성해 성경 번역작업에도 착수했다. 1900년에는 한글 신약전서를 완역하고 정동제일교회에서 봉헌예배을 드렸다. 아펜젤러는 ‘죠션크리스도인회보’를 발간하면서 교계 소식을 알리기도 했다. 1902년 순직하면서 신문은 언더우드가 발간하던 ‘그리스도신문’과 통합하며 명맥을 이을 수 있었다. 

다방면에서 열정적으로 사역했던 안펜젤러에게는 쉼이 필요했다. 1885년 조선에 들어올 당시 90kg이었던 몸무게는 첫 안식년을 떠나기까지 7년 사이 63kg이 됐다. 두 번째 안식년 때는 60kg이었다. 학교와 교회뿐 아니라 성경번역, 출판, 문화 등 다양한 사역을 펼치면서 그의 몸은 쇠약해졌다. 심지어 안식년에 귀국한 아펜젤러를 친구가 몰라볼 정도로 많이 변해 있었다.
언더우드가 그랬던 것처럼 아펜젤러 역시 안식년을 소홀히 보내지 않았다. 미국 전역을 순회하며 선교 보고를 하고 말씀을 전하면서 조선 선교를 위한 후원을 요청했다. 

두 번째 안식년을 마친 1901년 9월 아펜젤러는 자녀들의 교육 때문에 아내와 4남매를 두고 혼자서 조선으로 돌아왔다. 장녀 엘라가 당시 신경쇠약으로 불안증세를 보여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대를 이은 조선 선교
1902년 아펜젤러는 비운의 사고로 군산 앞바다에서 순직했다. 그런데 아펜젤러의 순직에는 안타까운 비사가 있다. 당시 한반도에서는 러일 간 대립이 극심해졌다. 아펜젤러는 경기도 시흥 무지내(茂芝內)교회에 가던 중 한 일본인 철도 노무자들로부터 폭행당했다. 러시아인으로 착각한 시비였다. 범인들은 재판에 회부됐고, 아펜젤러가 법정 증인으로 참석하면서 목포에서 예정됐던 성경번역위원회 회의에 늦게 출발할 수밖에 없었다.

1902년 6월 11일 일본 증기선 ‘구마가와마루호’에는 아펜젤러와 조사 조한규, 목포 출신 정신학교 여학생이 함께 탔다. 배 안에서 아펜젤러를 만났다는 미국인 사업가 보일비의 증언에 따르면 아펜젤러는 충분히 갑판으로 탈출할 수 있었지만, 머뭇거리는 모습이었다고 한다.

그리피스가 사고 당시 아펜젤러 마지막 모습을 목격한 보울비의 증언을 토대로 이렇게 기록을 남겼다. “왜 아펜젤러는 옷을 다 입었는데도 갑판에 올라가는 일을 지체했을까. 자신의 목숨을 구할 1~2분 골든타임을 놓쳤을까. 자신의 한국인 비서와 돌봐야 할 여학생을 불러 깨워 갑판 위로 데리고 나오려다가 정작 목숨을 잃고 말았던 것이다.” 비록 친일인사 그리피스의 글이지만, 증언을 토대로 한 대목과 아펜젤러의 인품을 고려할 때 충분히 가능할 일로 당시에도 인정된 바 있다.

아펜젤러가 순직할 당시 미국에 있던 장남 헨리 닷지 아펜젤러는 12살에 불과했다. 아내 엘라 아펜젤러는 4자녀를 온갖 고생을 하며 길러내야 했다. 장남은 아버지의 죽음을 이해할 수 없어 심하게 방황한 때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 아버지의 대를 이어 선교사로 헌신하고 조선으로 돌아왔다. 둘째 아이다는 일본선교사로 나갔고, 앞서 장녀 앨리스 역시 조선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며 아버지의 선교 정신을 계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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