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생을 바쳐 복음을 심고, 민족을 일깨웠던 선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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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생을 바쳐 복음을 심고, 민족을 일깨웠던 선각자
  • 이인창 기자
  • 승인 2024.03.02 19: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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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기독교 140주년 기념 ‘선교사 열전’ ④ 개척자,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하)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1859~1916)

구한 말 조선은 격랑 그 자체였다. 명성황후가 시해될 정도로 국력은 약해졌고, 고종 황제는 무기력하기만 했다.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1859~1916) 선교사도 구한 말 정치 역사와 무관할 수 없었다. 특히 황후 시해 후 언더우드를 비롯한 선교사들은 일제 만행에 분노해 밖으로 실상을 알리고자 했고, 고종의 안위를 지켜주고자 애썼다.

그런 상황에서도 언더우드의 초점은 항상 복음이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전도에 힘썼다. 조선 근대화를 위한 공로도 혁혁했다. 오선지 악보로 만든 찬양집 발간, 대한기독교서회의 모체인 연합기관 ‘조선셩교서회’ 설립, YMCA 설립 지원, 순 한글판 ‘그리스도신문’ 창간 등 많은 것에 도전했다. 

언더우드는 우리나라 근대교육의 씨앗을 심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처음 만든 고아원은 경신학당과 언더우드학당으로 발전했고, 연세대 전신 연희전문대학도 설립했다. 조선을 사랑하고 복음에 열정적이었던 언더우드는 사명을 마치고, 1916년 10월 12일 고국에서 주님 품에 안겼다. 

무엇을 하든 복음전파 생각뿐
성경을 번역하고 신문을 발간하는 바쁜 일상 중에도 언더우드는 전도 여행을 간과하지 않았다. 정치적 소용돌이에 엮이면서도 시간이 날 때면 교리서와 단권 성경을 싣고, 이북 지역을 다니며 전도했다. 

1900년 가을 800km를 걸으며 전도를 다니던 언더우드는 뜻밖의 제보를 받았다. 고종 황제가 전국 모든 선교사와 기독교인을 도륙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는 것. 고종과 가까웠던 언더우드는 즉각 위조문서임을 알았지만, 중요한 것은 선교사들과 기독교인들의 안전이었다. 언더우드는 정보가 새 나가지 않도록 라틴어로 서울로 전보를 보냈고, 미국 공사관과 조선 조정이 해명하고 나서 위기는 사라졌다. 언더우드의 기지가 수많은 생명을 살렸다. 

언더우드는 1890년부터 집에서 ‘신학반’을 개설해 교회 지도자를 길러내고 있었다. 하지만 1개월 과정은 미흡했다. 4개 장로교 선교부는 ‘장로교선교공의회’를 만들었고, 1901년 평양에 신학교를 정식 개교했다. 언더우드도 평양신학교에서 학생들에게 강의했다. 
언더우드는 청년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YMCA 운동에 주목하고, 아펜젤러와 함께 YMCA

국제위원회에 YMCA 설립을 청원했다. YMCA를 정치단체로 오인한 고종의 반응에 무산되기도 했지만, 중국 의화단운동의 핍박을 피해 서울로 피난하고 있던 텐진YMCA 라이언(D W Lyon) 선교사가 다시 뉴욕본부에 건의하면서 횡성기독교청년회(YMCA)가 만들어졌다. 뉴욕본부는 질레트(Philip L Gillett) 선교사를 파송했다.

YMCA를 통해 젊은이들이 좋아할 만한 야구, 농구 등 스포츠들이 도입됐고, 언더우드는 YMCA를 발판 삼아 청년 선교에 더욱 매진할 수 있었다. 정식 이사로 활동한 언더우드는 종로에 있는 YMCA회관 건축 부지를 마련하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YMCA회관에서 연희전문학교 강의도 시작됐다. 

언더우드와 이승만 만나다
최근 새롭게 조명되고 있는 이승만 전 대통령과 언더우드와 인연도 흥미롭다. 이승만은 독립협회 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한성감옥에 수감되어 있었다. 그의 건의로 1902년 옥중학당과 도서관이 개설되었고 선교사들이 기증한 책을 읽다가 이승만은 감옥에서 기독교로 개종했다. 이승만은 이상재, 안국선, 유성준 등 개화파 인사들을 포함해 40여명이나 전도하기도 했다. 

1904년 고종의 사면으로 출옥한 이승만이 미국 유학을 떠나려 할 때, 언더우드는 직접 8통의 추천서를 써 주었다. 2015년 연세대 이승만연구소가 111년 만에 언더우드의 추천서를 공개한 바 있다. 

“이승만은 그의 조국에서 위험한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투옥되어 수년간 정치범으로 복역했던 한국의 기독교인입니다. 그의 노력 덕분에 지난해 저도 감옥에서 수감자들과 예배를 볼 수 있도록 허가받을 수 있었습니다.” 

백만인구령운동의 책임 맡아
열정을 다해 선교하던 언더우드의 건강에도 비상이 걸렸다. 1906년에는 아주 긴 유언장을 작성할 정도로 자신도 건강을 장담하지 못할 정도였다. 결국 이듬해 세 번째 안식년을 위해 미국으로 떠났다.

1907년 조선에서는 평양대부흥운동의 물결이 일었고, 미국 선교부에도 이 소식이 전해지자 마침 미국에 있던 언더우드 등 선교사들을 모아 ‘한국선교평의회’를 조직했다. 평의회에서 20명 선교사를 조선에 더 파송하기로 하자, 언더우드는 미국 전역을 다니며 파송 선교사들을 위한 사역비를 모금했다. 

1909년 귀국 후 언더우드는 1910년 10월까지 전개됐던 초교파 전도운동 ‘백만인구령운동’ 책임을 맡았다. 당시 최대 20만명 정도가 기독교인일 때 100만명 전도 목표를 세웠고 대중 전도집회를 열고 축호(逐戶) 전도를 펼쳤다. 금요철야의 시작도 이때라고 보고 있다. 

백만인구령운동의 목표는 달성하지 못했지만, 다양한 교단에 속한 전국의 모든 신앙인들이 하나로 모아졌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 프로젝트였다. 언더우드는 각 교단 선교부가 조선에서 선교지 분할을 협의할 때 난항을 겪자,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적절한 분할 방법을 내어놓았고 만장일치로 통과된 바 있다. 교파 간 마찰을 피하도록 한 그의 묘수였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1916년 10월 12일 57세를 일기로 이 땅에서 사명을 마치고 미국에서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사진은 2016년 10월 19일 서울YMCA에서 진행된 장례식. 

조선 독립을 열망했던 언더우드
언더우드는 대한제국의 쇠퇴와 고종의 퇴위를 눈앞에서 바라봐야 했다. 일찍부터 일본 영사관은 헤이그 밀사로 파견됐던 헐버트 선교사와 함께 언더우드를 철저히 감시하고 있었다. 심지어 조선뿐 아니라 미국에 머물 때 동정까지 보고됐다.

1909년 통감부에 보고된 헌병대 보고서에는 언더우드의 연설 내용이 보고되어 있었다. 
“여러분은 한층 용기를 내어 우리 교회를 더 성대하게 만들어, 제가 믿고 사랑하는 곳인 한국으로 하여금 순연한 독립국이 되게 하는 것에 항상 유의하여 결코 한순간도 망각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조선총독부가 날조한 ‘105인 사건’에도 언더우드의 이름이 등장한다. 조선총독부는 언더우드를 주범들과 엮어내려고까지 시도했다. 하지만 언더우드는 흔들림이 없었다. 1912년 아들의 대학 졸업식 참석차 미국에 갔을 때에는 미국 정부가 개입해 105인 사건을 외교문제로 비화하도록 만들려고 노력하기까지 했다. 

105사건 이후 일제의 탄압을 우려해 사람들은 언더우드의 복귀를 만류하기도 했다. 귀국 후에는 인재 양성이 더욱 중요함을 자각하고 서울에서 기독교대학 건립을 보다 적극 추진했다.

그러던 중 1913년 말부터 언더우드의 건강이 아주 심각해졌다. 의료선교사 에비슨은 전문 치료를 당장 받아야 한다 했지만, 그는 사역을 멈추지 않았고 주말에는 지방 교회까지 순례했다. 몸은 좋지 않았지만 감사하게도 언더우드가 그토록 소망했던 연희전문학교가 1915년 개교했고, 언더우드는 일본어를 통달해야 한다는 일제 교원 규정을 충족하려고 일본으로 공부를 떠나기까지 했다. 어학공부까지 겹쳐 무리한 탓에 건강은 더욱 악화됐고, 1916년 3월 조선으로 돌아와 잠시 머문 후 4월 제물포항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배웅을 받으며 미국으로 돌아왔다. 몸은 더 이상 회복되지 않았다. 언더우드는 1916년 10월 12일 57세 나이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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