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5년 조선 땅에서 본격적인 사역에 돌입한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1859~1916)는 학교와 교회 설립뿐 아니라 복지사역, 문서선교와 선교사 개발 등 폭이 넓고 깊이도 깊은 선교를 펼쳤다. 미국 공사관이나 알렌 선교사는 조선 조정에서 허가하지 않은 활동에 우려했지만, 언더우드 선교사의 사역은 황실과 신뢰를 두텁게 하면서도 직선적이고 직접적으로 사역에 집중했다. 신혼여행마저 전도여행 차 서북지방으로 떠날 정도였다. 물론 역경과 좌절, 위기도 있었다. 그러나 젊은 선교사 언더우드에게 포기는 없었다. 조선에서 그가 써 내려간 최초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예비해두셨던 듯 척척 맞아떨어졌다.
고아원 사역으로 본격 출발
공식적으로 조선에서 직접 선교는 불법이었다. 언더우드는 처음 제중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긴 했지만, 더 밀접하게 조선 사람에게 다가가기 위해 ‘고아원’을 설립했다. 언더우드 집안이 영국에서 살 때 아버지가 ‘조지 뮐러’의 고아원 사역을 적극 후원했던 것을 언더우드 기억하고 있었다. 1886년 미국 공사관을 통해 조선 조정으로부터 설립 허가를 받은 후 주택을 하나 매입해 고아원을 시작했다. 고아들 중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표로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했던 우사 김규식도 있었다. 곧 죽을 것이라며 거두지 말아야 한다는 반대에도 언더우드는 어린 김규식을 품었다. 이후 언더우드 주선으로 미국 유학을 갔고, 독립운동가의 길을 걸었다.
말도 안 되는 헛소문에 힘든 시기도 있었다. 선교사들이 고아를 데려다가 잡아먹는다거나 노예로 팔아버린다는 이야기를 누군가 흘려 저자에 나돌았고, 급기야 주민들이 복수하겠다며 폭동이 일었다. 이른바 ‘영아(嬰兒)소동’이 벌어졌던 것. 언더우드 고아원은 1897년 미북장로회의 선교 재정비로 폐쇄됐지만, 고아원 아이들은 다른 선교사들이 계속 맡아주었다. 그의 고아원 사역은 선교사들을 통해 학교로 발전됐다.
투철한 복음전파의 사명으로
한국교회 선교 초기, 언더우드와 서상륜이 서울에서 만나 협력했던 역사는 흥미롭다. 일찍부터 언더우드는 가는 곳마다 조선 사람들을 만나 자신이 만든 번역자료로 복음을 전했다. 1886년 7월 사역 1년 만에 ‘노춘경’이라는 인물에게 첫 세례도 베풀었다. 다만 노춘경이 조선 땅에서 첫 사례자는 아니었다. 이미 만주에서 존 로스, 존 매킨타이어와 같은 스코틀랜드 선교사들을 만나 예수를 믿었던 백홍준, 서상륜, 이응찬 등은 이미 조선 땅을 오가며 열심히 전도했고 세례의 열매를 맺고 있었다. 선교사들은 압록강을 건너와 수십명에게 세례를 베풀곤 했다.
서상륜은 서울을 오가면서 복음을 전하고 있었고, 1886년 말 언더우드를 직접 만났다. 언더우드를 만난 서상륜은 황해도 소래교회를 소개했다. 1883년 5월 16일 조선 최초로 자생적으로 세워진 소래교회에 성도 수십명이 있다면서, 언더우드에게 와서 세례를 베풀어 달라고 요청했다. 선교사의 여행이 제한된 탓에 성사되지 못하자, 서상륜은 1887년 1월 소래교회 교인 서경조, 최명오, 정공빈을 데리고 직접 서울로 왔고, 언더우드는 세간의 눈을 피해 세례식을 집례했다. 허가되지 않은 세례식은 매우 위험한 모험이었다. 하지만 소래교회 성도들은 여러 차례 찾아와 언더우드에게 세례를 받았다.
결국 언더우드는 결국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동에 가보기로 했다. 송천(松川)의 우리말은 솔내인데, 선교사들이 잘못 부르면서 소래교회라 됐다. 미 공사관과 알렌 선교사는 펄쩍 뛰었지만 말릴 수 없었다. 어쩐 일인지 조선 조정에서 여행허가증까지 내주었다.
언더우드의 첫 번째 전도여행은 황해도뿐 아니라 개경, 평양, 의주까지 이어졌다. 언더우드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은 몰려들었고 지역마다 세례를 받길 원하는 그룹들이 형성돼 있었다. 2차 전도여행 중 ‘야소교(耶蘇敎)금지령’이 내려져 중도에 돌아왔지만, 이후 의료선교사 릴리어스 호턴과 결혼하고 신혼여행마저 전도여행으로 갈 정도로 언더우드는 복음전파 사명에 투철했다.
한편, 1887년 9월 27일에는 언더우드로부터 세례를 받은 교인 14명과 함께 ‘새문안교회’를 창립했다. 이 땅에서 선교사가 세운 최초의 교회였다.
네비우스를 초청한 언더우드
내한 선교사들은 선교 초기 심한 갈등을 겪기도 했다. 언더우드 역시 이런 문제에 엮여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다. 앞으로 더 많은 선교사들의 내한을 앞두고 원칙과 조율이 필요할 때, 언더우드는 중국에서 오랫동안 활동해온 원로 선교사 네비우스를 초청했다. 네비우스는 1890년 2주 동안 선교 경험을 나누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선교 원칙을 강의했다. 네비우스 선교정책은 3자 원칙이 핵심이다. 토착인이 토착인을 전도하는 ‘자전’(自傳, self-propagation), 토착 교인이 토착 교회 목회자의 생활비와 교회 운영을 책임지는 ‘자립’(自立, self-supporting), 토착 교회 문제를 토착 교인들이 처리하도록 하는 ‘자치’(自治, self-governing)이 내용이다.
언더우드는 네비우스의 3자 원칙을 사역 현장에 적용했다. 새문안교회가 부흥해 새 예배당이 필요할 때 교인들 스스로 교회 건축을 추진하도록 한 것이 대표적 사례이다. 언더우드 선교사의 노력으로 한국교회에는 네비우스 선교정책이 도입되었고,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부흥의 역사를 한국교회 성도들이 스스로 일궈올 수 있었다.
안식년조차 선교자원 발굴에
1889년 결혼 후 일 년 만에 첫아들 호러스 호턴 언더우드(한국명:원한경)를 낳았지만 아내 릴리어스 선교사의 몸이 많이 좋지 않았다. 의사들의 권유로 1891년 안식년 차 미국으로 돌아왔다. 언더우드가 선교사로 가 있는 동안 가업을 이은 큰형 존 T. 언더우드는 사업을 크게 일궜다. 유명한 언더우드 타자기로 대성공을 거뒀다.
모처럼 방문한 고국이었지만 언더우드의 머리와 마음은 언제나 조선이 앞섰다. 거처를 마련하자마자 선교사와 선교기금 발굴을 위해 강연을 다니며 동분서주했다. 교단 선교부를 찾아가 더 많은 선교사를 보내달라고 설득했다. 파송 선교사를 얻기 위해서는 재정적 후원이 필요하다는 답변을 들어야 했을 때 준비된 손길이 있었다. 바로 형 T. 언더우드가 6명의 선교사 생활비를 책임지겠다고 나섰다. 그리고 자원하는 선교사들이 생겼다.
언더우는 2년 동안 미국에 머물며 테이트, 레이놀즈, 존슨, 전킨 등 우리 선교역사에서 굵직한 업적을 남긴 젊은 선교사들을 발굴했다. 특히 토론토의과학 교수로 안정적 생활을 하고 있던 올리버 에비슨에게 조선 선교를 직접 도전했고, 헌신의 약속을 받아냈다. 에비슨이 속한 캐나다감리회가 재정 여건을 이유로 파송하지 못하자, 언더우드는 미 북장로교 파송을 주선했다. 고종의 주치의까지 맡을 정도로 실력이 뛰어났던 에비슨은 우리나라 의료선교 역사의 지대한 업적을 남겼다.
한편, 한국교회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하나님’ 명칭과 언더우드 선교사 간 관계도 재미있다. 언더우드는 ‘하나님’이라는 명칭 사용을 처음엔 반대했다. 방한 선교사들은 ‘야훼’를 어떻게 번역할지를 두고 고민했다. 유일신 하나님을 나타내면서도 알아듣기 쉬운 번역이 필요했다. 이미 존 로스는 ‘하느님’, 이수정은 ‘신(神)’을 사용하고 있었다. 언더우드는 처음엔 ‘하ᄂᆞ님’을 반대하고 ‘상제(上帝)’, ‘여호와’, ‘천주’ 등의 용어를 지지했다. 하지만 1904년 자신의 주장을 기꺼이 내려놓고, 출중한 국어실력을 갖추고 있던 제임스 게일 선교사의 제안을 수용해 ‘하ᄂᆞ님’ 사용에 동의했다. 이후 지금까지 한국교회는 ‘하ᄂᆞ님’=‘하나님’을 사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