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교육과 한국 감리교회의 주춧돌 놓은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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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교육과 한국 감리교회의 주춧돌 놓은 선교사
  • 이인창 기자
  • 승인 2024.03.06 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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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기독교 140주년 기념 ‘선교사 열전’ ⑤ 조선에서 마지막까지, 헨리 거하드 아펜젤러 (상)

조선 땅에 감리교회가 뿌리내리도록 헌신했을 뿐 아니라 일제강점기 시절 독립운동가들의 산실이 되어주었던 배재학당을 설립한 헨리 거하드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 1858~1902). 그는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 언더우드 선교사와 함께 제물포항으로 입항한 또 한 명의 최초의 목사 선교사였다. 

엘라(Ella Dodge Appenzeller)와 이제 갓 결혼한 20대 청년 아펜젤러는 은자의 땅 조선에 복음 전파의 사명을 안고 찾아왔다. 누구 못지않게 열정적으로 사역하다 40대 초반에 순직했다. 이해할 수 없는 부친의 죽음에도 자녀들은 이끌리듯 조선 땅으로 돌아와 대를 이어 사랑을 나눠주었다. 언더우드 선교사와 함께 한국 선교의 또다른 최초의 역사를 기록한 아펜젤러와 그 일가의 삶과 사역을 들여다본다. 

은자의 땅, 조선을 향해
아펜젤러는 어린 시절 개혁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청소년기 감리교회로 옮겨 신앙생활을 했다. 개혁교회가 가진 경건주의와 감리교회가 가진 체험적 신앙이 그가 펼친 선교사역의 중요한 자산이 됐다. 

아펜젤러는 감리교 선교사 중 처음으로 조선 땅을 밟았지만, 원래는 의사였던 스크랜턴(William Benton Scranton) 선교사와 이화학당을 설립한 어머니 스크랜턴 여사(Mary Fletcher Benton Scranton)가 먼저 조선 선교사로 파송을 받았다. 실제로 아펜젤러 부부와 스크랜턴 부부와 스크랜턴 여사는 샌프란시스코에서 함께 조선으로 출발했고, 일본에서도 같이 기착했다.

일본에서의 경험이 풍부한 매클레이 선교사를 만나 동북아시아 역학관계와 조선의 상황, 선교사 주의사항 등에 대해 배울 수 있었다. 일행 중 아펜젤러 선교사가 먼저 조선에 들어가기로 결정됐다. 아펜젤러는 당시 임신 중이던 아내와 함께 1885년 3월 31일 일본을 떠나 4월 1일 부산에 도착했고, 이틀을 체류한 후 4월 3일 다시 출항해 4월 5일 오후 3시경 제물포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주한 대리공사 포크는 당시 정치·사회적 여건상 선교사역에 부정적이었고, 선교사들의 서울 입성을 반대했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그날로 곧장 서울로 출발했지만, 아펜젤러는 임신한 아내와 함께했기에 제물포에 일단 머무르기로 했다. 더구나 임신 중이던 아내의 건강이 좋지 않아 만약을 대비해야 했다. 

아펜젤러는 제물포에서 여러 외교관을 만나며 조선 상황을 자세히 듣게 되었고, 불가피하게 일본으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아펜젤러 선교사가 설립한 우리나라 근대교육의 요람, 배재학당은 수많은 민족지도자를 양성해 냈다. 사진 속 배재학당 건물은 현재 역사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아펜젤러 선교사가 설립한 우리나라 근대교육의 요람, 배재학당은 수많은 민족지도자를 양성해 냈다. 사진 속 배재학당 건물은 현재 역사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조선에서 태어난 첫아기
아펜젤러 선교사는 포기하지 않았다. 일본에 돌아가 스크랜턴 선교사와 정보를 나눴고, 이번에는 스크랜턴 선교사가 홀로 조선을 향한 끝에 5월 3일 서울까지 들어갔다. 스크랜턴 선교사는 일 년 전부터 사역하고 있던 의사 알렌 선교사를 도와 곧바로 광혜원에서 사역을 시작했다. 그리고 아펜젤러 선교사에게 서신을 보내 입국해도 될 상황임을 알렸다. 

아펜젤러 부부와 다른 스크랜턴 가족, 미국 북장로교 파송을 받은 의료선교사 헤론 부부가 동행한 가운데 6월 20일 제물포항에 도착했다. 아펜젤러는 약 한 달간 제물포에 머물며 조선 선교를 준비했고, 스크랜턴이 주거지를 마련했다는 연락을 보내자 1885년 7월 29일 임신한 아내를 데리고 마침내 서울로 향했다. 

아펜젤러 부부는 지금의 정동에 집을 사서 가족들을 위해 주거환경을 개선했다. 특별히 곧 태어날 아기를 위한 준비였다. 그곳에서 1885년 11월 9일 큰딸 앨리스 레베카 아펜젤러(Alice R. Appenzeller)가 태어났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출생한 서양인 아기라고 할 수 있지만, 그보다 최초로 유아세례를 받은 아기라는 점에서 의미가 더 크다.

앨리스는 1902년 아버지가 순직할 당시 미국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학업을 마친 후 자신도 아버지를 따라 1915년 파송을 받아 내한했다. 그는 일제강점기 하에서 이화학교 교사로 시작해 교장으로 학교를 이끌었다. 1940년에는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되기도 했다. 

고종이 지어준 이름 ‘배재학당’
아펜젤러는 정동을 기반으로 본격적인 선교사역을 위한 토대를 닦았다. 조선 말을 우선 배우기 위해 노력한 끝에 말과 언어에 있어서 이른 시기에 수준급에 이르렀다.

그리고 마침내 근대교육의 요람이라 일컫는 배재학당의 문을 열었다. 1885년 8월 스크랜턴의 의료사역을 돕던 의사 지망생 2명이 영어를 배우겠다며 아펜젤러를 찾아왔고, 그들이 배재학당의 첫 씨앗이었다. 소문이 나면서 배재학당에 나오는 학생들은 크게 늘었다. 

포크 공사의 주선으로 같은 해 10월 말 아펜젤러는 고종 황제를 만나 그의 교육사업에 대한 계획과 포부를 설명했다. 고종은 그의 뜻을 긍정적으로 생각했고, 1887년 2월에는 이름까지 지어 현판까지 내려주었다. 고종이 지어준 이름이 인재를 기른다는 의미의 ‘배재(培材)’였다. 황제가 이름을 지어주었다는 것은 아펜젤러의 교육사업을 간접적으로 정부가 보증한다는 의미이다. 고종은 함께 스크랜튼 대부인의 학교에는 이화학당(梨花學堂), 스크랜튼의 병원에는 시병원(施病院)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배재학당은 먼저 조선 조정이 근대교육을 위해 설립했던 육영공원보다 교육과 학제가 철저했다. 학칙도 엄격했다. 주로 영어, 수학, 과학, 한글, 미술, 음악 등 과목을 가르쳤고, 이후 대학 과정으로 신학부와 의학부까지 개설해 전문가를 길러내게 됐다. 아펜젤러가 처음부터 품었던 대학 설립의 꿈이 실현되어 갔다.

배재학당 초기에 만들어진 교훈 “크고자 하는 자는 남을 섬기는 자가 되라”(欲爲大者 當爲人役)는 수많은 민족지도자를 배출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성경 말씀으로 삼은 교훈은 “조선과 조선 백성들에게 필요한 인물”을 길러내겠다는 아펜젤러의 열망을 담아내고 있었다. 배재학당은 초대 대통령 이승만, 한글학자 주시경, 독립운동가 서재필, 민족시인 김소월, 독립군 장군 지청천, 의학의 선구자 오긍선 등 수많은 인재를 실제로 배출했다.

포기할 수 없는 신앙교육
아펜젤러는 학생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자 미국 선교본부에 새로운 학사 건축과 후원을 요청했다. 선교본부는 제안을 받아들였고, 빨간 벽돌로 된 서양식 건물이 지어졌다.

배재학당이 본격화 되었다고 해서 선교까지 순탄했던 것은 아니었다. 공식적으로 조선에서 선교는 금지된 상황에서 학생들 중에는 교과서 내 기독교적 요소에 반발하거나 거부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아펜젤러는 자신의 수업 중 성경을 가르쳤다. 

소중한 열매도 있었다. 1887년 박상중, 한용경 학생이 아펜젤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이것을 계기로 1887년 한옥을 얻어 ‘벧엘 예배당’(Bethel Chapell)을 시작했다. 이곳이 바로 첫 한국감리교회 정동제일교회였다. 

한편, 아펜젤러는 정부 주도의 교육기관 ‘육영공원’을 책임져달라는 제안을 2번이나 받았지만 거절했다. 안정적이고 명예로운 직위를 받았을 수 있었지만, 그의 최종 목표는 선교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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