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잔틴제국의 멸망은 동방 정교회의 쇠퇴 가져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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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잔틴제국의 멸망은 동방 정교회의 쇠퇴 가져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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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4.04.08 2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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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가톨릭교회와 동방정교회
▲ 조병하 교수

프란키스쿠스수도회와 도미니쿠스수도회에 의한 로마 가톨릭교회의 선교는 보편적으로 신앙의 토착화에 무관심하였고 복음 선교를 위하여서는 기존 토착문화의 질서가 파괴되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이러한 선교방법에 변화를 가져온 선교는 예수회 소속선교회 선교사들을 통하여 일어났다. 선교지의 문화와 관습, 생활을 이해하려고 노력 하였다. 그래서 선교사들은 토착민과 의식주을 함께 하였다.

마태오 릿치(1552-1610)가 중국 북경에서, 프란치스꼬 드 사비에르(1506-1552)와 알렉산드르 발리냐노(1537-1606)가 일본에서 1540년 예수회의 선교사업을 펼쳤다.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토착신앙을 통한 선교방법이 공식원칙이 되었으나, 1704년에 교황 클레멘스 11세(1700-1721)가 예수회의 토착화 선교방법을 정죄하였다. 마찬가지로 중국에서도 마테오 릿치가 조상제사를 허용하였던 순응방법이 1715년 금지되었다.

교회의 조상제사 금지는 1742년에 교황 베네딕투스 14세(1740-1758)의 교령으로 재확인되었고, 1939년에 이르러서야 해제되었다. 1773년 예수회의 일시적인 선교해체와 조상제사의 금지는 크게 선교의 위축을 불러왔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교회 역시 프로테스탄트교회처럼 19세기에 다시 선교의 위대한 세기를 맞게 되었다.

또한 트리엔트공의회(1545-1563) 이후 로마 가톨릭교회는 교회의 개혁과 함께 교황중심의 강력한 중앙집권의 시대를 맞게 되었다. 그러나 17-18세기 유럽의 절대군주들의 출현은 로마 가톨릭교회에 매우 충격적이었다. 다시 군주들은 교황의 권리를 약화시키고 자신들의 통치 영역 내에 있는 교회들을 지배하려고 하였다. 프랑스에서 교회가 로마교황권에서 완전히 독립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삐에르 삐투(1539-1596)는 ‘갈리아교회의 자유’를 써서 프랑스왕의 교회의 권한을 피력하였다.

더욱 절대 군주 루이 14세(1661-1715)의 영향으로 국교회 사상은 절정에 달했다. 이로 인해 프랑스 내에서 교황권이 약화되고, 공의회 우위 사상, 프랑스교회의 자율권, 교황의 무오성에 대한 거부 등이 나타났다. 1690년 교황 알렉산더 8세의 항의를 받고 1693년 루이 14세는 이와 같은 조치들을 취소하였으나 19세기까지 그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독일의 주교들도 자주권을 주장하였다. 트리에르의 주교 요한 니콜라우스 폰 혼타임(1701-1790)은 1673년 그의 글 ‘교회의 상태와 로마 교황의 합법적 권한에 관하여’를 유스티누스 페브로니우스라는 익명으로 발표하였다. 여기에서 페브로니아주의라는 명칭이 나왔다. 혼타임은 천국의 열쇠가 교황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전 교회 즉 주교들로 구성된 공의회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로마 교황은 다만 보편적 교회의 교회일치를 이루고 교회법을 보존하기 위하여 있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는 국왕의 우위권을 옹호하지는 않았다. 교황 클레멘스 13세(1753-1769)는 페브로니우스 사상을 정죄하였다.

18세기 말 프랑스 혁명 초기부터 교황은 혁명의 진전을 막으려고 노력하였다. 1789년 11월 프랑스국민의회는 교회의 토지를 몰수하였고, 1790년 수도원들이 법에 의해 철폐되었다. 같은 해 여름 프랑스 정부는 프랑스 시민법을 반포하여 성직자들을 국가의 감독 아래 두었다. 국가가 성직자들의 생활비를 지불하면서 성직자들은 국가에 충성을 맹세해야 했다. 1791년 헌법으로 종교의 자유가 허락되었으나 1793년 로마 가톨릭교회 신도들이 일으킨 폭동으로 수백 명의 성직자들이 참수 당하였다. 그리스도교의 달력을 폐지하고 일요일을 휴일로 하지 아니하고 10일 마다의 휴일을 시행하였다. 이 달력은 1793년 10월 7일에 채택되어 1804년까지 지속되었다.

1453년 오스만 투르크 족에 의한 비잔틴제국의 멸망은 동방 정교회의 쇠퇴를 가져왔다. 1439년 비잔틴제국의 위기는 피렌체회의에서 동서교회의 통합을 결의했었다. 이 때 러시아 정교회는 1448년 그리스 정교회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러시아 정교회는 이제 자신들만 남았다고 생각했고, 모스크바 공국은 자신들이 비잔틴제국의 계승자라고 생각하였다. 정통교회의 영원한 세 번째 로마가 모스크바라는 이론을 펼친다. 1589년 러시아정교회는 모스크바 총대주교구를 형성하여 민족교회가 되었다.

1613년 모스크바의 총대주교의 필라레트의 아들 미하일 로마노프(1613-1645)가 짜르(황제)에 선출되어 1917년까지 러시아를 지배한 새로운 왕조가 되었다. 피터 대제(1682-1725)는 절대왕정을 확립하고 서방적인 개혁을 단행하여 교회가 국가에 종속된 기관이 되기를 바랐다. 1721년 교회개혁가들은 교회법정과 비슷한 신성 교회감독회의라는 기구를 만들어 황제 아래서 총대주교를 대신해 교회행정업무를 담당케 하였다. 이렇게 발전하여 정교회는 1917년까지 국가의 부서에 지나지 않았다. 민족주의와 근대 지적운동의 발흥으로 동방교회 역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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