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 신앙은 하나님은 한 분이심을 고백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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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 신앙은 하나님은 한 분이심을 고백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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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3.01.18 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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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하 교수의 풀어쓰는 이야기 교회사 (22)

                                         삼위일체 신앙 논쟁역사

▲ 백석대 역사신학
삼위일체 신앙논쟁은 325년 니키이아회의가 열리고 신앙고백이 결의됨으로써 끝난 것이 아니었다. 역사적으로 삼위일체 신앙을 위한 논쟁은 실상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논쟁들을 통하여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이 성경의 해석과 신학의 표현에 의하여 분명해지고 온전히 고백되어질 수 있었다.

그리스도인들이 ‘삼위일체’라는 고백을 통하여 증거하고자 하는 바는 새로운 것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었다. 우선 신명기 6장 4절에 기록되어 있는 바대로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리고 피조물인 인간이 타락함으로써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는데, 이러한 인간을 구원하려고 하나님이 친히 인간으로 성육신하심으로써 하나님이 우리 중에 분명히 자신을 계시하신 사실이다.

인간을 구원하고자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중에 오심으로 하나님이 아버지, 아들, 성령으로 구별되심을 증거하게 되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나님이 한 분 하나님이시며, 셋으로 구별되시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었던 것이다.

니카이아회의 이전의 정통 신학은 종속론적 이해를 갖고 이었다. 당대 중기 플라톤 로고스 사상에 영향을 받아 긴장 중에 있던 로고스 신학의 흐름은 아버지에게 아들이 종속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잠재되어 있던 논쟁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제한되어 있었고, 니카이아 신앙고백을 통하여 아들이 아버지와 ‘동일본질’이라고 고백하게 된 것이다.

니카이아회의 논쟁에서 분명해진 신학의 흐름은 아리우스와 그의 동조자들에 의해 주장되었던 ‘상이본질’신학이었다. 극단적인 입장에 서 있던 이들의 이러한 주장은 사람들로부터 적극적인 후원을 받지 못했다. 그리고 니카이아 회의에서 신앙고백은 이끌어내었지만 신앙고백에 추가했던 ‘아들이 아버지와 호모우시오스이시다’는 주장이 충분히 ‘동일본질’ 신학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사실적으로 니카이아회의 참석자들 중에 동명의 니코메디아와 카이사레이아의 두 에우세비오스들을 중심한 중도파는 회의 참석자들의 다수를 이루었다.

아리우스와의 중심적인 싸움은 328년 알렉산더 감독 사후에 알렉산드리아에서 아리우스가 그들의 지지자들에 의하여 감독으로, 그리고 알렉산더감독의 추종자들의 지지를 받아 아타나시오스가 감독으로 추대되면서 아타나시오스 감독에 의하여 이끌어졌다.

또한 337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죽을 때까지 들어내 놓고 니카이아 신앙고백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논할 자가 없었다. 아직 스스로 자신들의 신앙하는 바를 구성해 낼 수 없었던 교부들은 황제가 죽은 후 활발하게 니카이아 신앙고백을 대체할 신앙고백서를 만들려고 부단히 노력하였다.

그러나 그와 같은 시도를 하면 할수록 니카이아 신앙고백의 가치는 더욱 빛났다. 그리고 35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는 ‘호모우시오스’를 동일본질로 이해하게 되면서 니카이아 신앙고백이 더욱 확고하게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350년대 말에 마카도니아인들이 성령을 피조물이라고 주장하면서 성령에 대한 고백도 수면 위로 올라오게 되었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동일본질이라고 고백하게 되었다(362년 알렉산드리아 회의, 아타나시오스 주도!).

니카이아회의 때에 중도파들 중에 로고스신학자들은 논쟁 중에서 358년 앙퀴라의 바실레이오스를 중심으로 유사본질신학을 확립하게 되었고, 이의 영향을 받은 세 카파도키아교부들은 아타나시오스와 논의 중에 자신들의 신학이 동일본질신학과 차이가 없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동일본질신학 입장에 서게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세 카파도키아 교부들은 새로이 ‘상이본질’신학을 주장했던 에우노미오스와 주요하게 논쟁하기도 하였으나 니카이아회의에서 중도적인 입장을 취했던 이들 중 한 부류의 흐름에서 형성된 ‘유사론 주장자들’과 최종적인 싸움을 놓칠 수 없었다. 유사론 주창자들의 신학 특성은 논쟁의 중심단어이었던 ‘본질’을 성경에 그 단어가 없다는 이유로 사용하기를 거부하였던 자들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아들 중 콘스탄티우스 2세가 350년 이 후 제국의 단독통치자가 되면서 그의 아버지처럼 제국의 전 그리스도교의 평화를 가져오길 바라는 시도에 편승하여 정치적인 이권을 챙긴 자들이었다. 그들은 니카이아 신앙고백에 대응하는 니케 신앙고백을 360/61년 콘스탄티노플에서 모였던 회의에서 완성하기는 하였지만 콘스탄티우스 2세가 죽으면서 실제적인 영향력을 끼칠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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