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사키 르포] 일본열도 서쪽에서 피어난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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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사키 르포] 일본열도 서쪽에서 피어난 신앙
  • 이덕형 기자
  • 승인 2012.09.26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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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열도의 성지 나가사키 순례길을 가다 (상)

▲ 나가사키 신고토 지역의 섬에는 박해를 피해 산과 섬 곳곳으로 퍼져간 신도들의 흔적 위에는 오늘날 교회당이 서있다. 사진은 나가사키 신고토 지역 해상 위에서 촬영한 일몰 사진.

핍박의 길 그 끝자락에 위치한 노쿠비ㆍ에부쿠로ㆍ카시로가지마 교회당

나가사키를 통해 일본에 복음이 처음 퍼진 해는 155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597년 기독교 박해를 시작한 이후 1614년 도쿠가와 막부의 기독교 금교령 발표에 이르기까지 일본 기독교 박해의 역사는 415년 간 이어져 내려왔다.

금교령 이후에도 260년간 잠복 그리스도교인으로 신앙을 지킨 일본기독교인들. 그들은 구전되는 라틴어 기도문을 붙들고 핍박 속에서도 7대까지 신앙을 유지했다.


‘후미에’와 ‘오라쇼’(Oratio). 일본 크리스천의 신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두 단어를 빼놓을 수 없다. 1612년 신자 색출을 위해 기독교 금지령을 공포한 도쿠가와 막부. 이 때 신자 색출을 위해 사용됐던 방법이 성화밟기 즉 ‘후미에’였다. 성화가 새겨진 목제나 금속판을 밟는 순간 멈칫하거나 망설이면 신자로 지목되어 즉각 처형됐다.

기독교 탄압은 과거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관계 맺었던 다이묘(영주)들의 도쿠가와 막부에 대한 충성심 점검을 위해 정치적으로 또는 반대 세력을 제거할 목적으로도 사용됐다. 이 때 신앙을 버리지 않은 영주는 영토를 몰수 당했고 그 가신이나 백성 중 신앙을 버리지 않는 자는 처형당했다. 지역에 따라 다르지만 ‘후미에’는 일반적으로 매년 실행했고 영주의 성격에 따라 몇 달에 한번 시행하는 곳도 있었다.

‘오라쇼’는 박해를 피해 섬과 산으로 혹은 다른 지역으로 퍼져간 일본 신자들이 신앙을 이어가기 위해 비밀리에 유지했던 라틴어 기도문이다. 1873년 2월 금교령이 철폐될 때까지 일본 잠복 그리스도교인은 종교 지도자가 없는 상황에서 초기에 전해진 라틴어 기도문을 붙잡고 260년의 세월을 견뎌냈다. 7대를 이어온 그들의 신앙. 일본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산인 나가사키 순례길을 일본나가사키순례센터 초청으로 따라가 보았다.


# 데츠카와 요스케

나가사키 순례길에 있어 먼저 알고 가면 좋은 인물이 있다. 테츠가와 요스케. 나가사키 서쪽에 위치한 고토열도 출신인 그는 1879년 건축업을 하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과거에 일본에 세워진 교회 중 10퍼센트 이상이 위치한 나가사키. 그 중 50개 이상의 교회당 건축에 참여했고 현재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록을 추진하는 교회당 대부분을 이 사람이 만들었다. 특이한 점은 전문적으로 건축학을 공부한 적이 없다는 것.

그의 건축 기술의 기초는 신부에게서 배웠지만 이후 계속된 노력과 연구로 서양 건축을 배워 독창적인 교회당을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첫 교회 건축에 참여한 것은 구소네 교회당이며 자신의 첫 작품은 히야미즈 성당이다. 많은 교회당을 건축했지만 마지막 눈감을 때까지 불교도였던 그는 일본에서 공존하고 있는 신앙을 이해할 수 있게 돕고 있다.

▲ 1908년 완공된 노쿠비 교회당은 일본 교회당 건축의 중심 인물 중 하나인 테츠카와 요스케가 지은 성당이다. 일본 서쪽 끝자락 까지 피해간 성도들의 염원은 당시 보기 힘든 벽돌 교회당을 섬 중앙에 만들어냈다.

# 노쿠비 교회당

본격적인 순례길 여정의 시작은 노자키 섬으로 향하는 길에서 시작됐다. 일본에서 가장 서쪽에 있는 섬. 지금은 무인도로 남겨진 이 섬에는 금교령이 풀린 뒤 세워진 교회당을 만날 수 있다. 일본 교회당 건축의 중심 인물 중 하나인 테츠카와 요스케가 벽돌로 만든 노쿠비 교회당. 박해를 피해 나가사키 지역에서도 도서 지방인 고토 지역으로 숨어든 일본 그리스도교인들은 불교와 신도 색채가 강했던 지역민을 피해 또 다시 산으로 숨어들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피하고 피해 고토에서도 마지막까지 옮겨간 끝자락이 바로 노자키 섬이다. 섬에는 노쿠비와 후나모리 두 그리스도교 마을이 있었는데 후나모리에는 1881년에 첫 교회당이 세워졌고 이듬해에 노쿠비에 교회당이 세워졌다.

▲ 노쿠비 교회당 내부 모습.
이후 두 마을 신자가 함께 교회당을 다시 세웠는데 그것이 주민들이 끼니를 줄여가며 모은 돈으로 어렵게 세운 노쿠비 교회당이다. 테츠카와 요스케는 당시 건축을 부탁받았을 때 목조 건물이 아닌 벽돌 건축 시공을 부탁 받았다.

그가 세운 첫 벽돌 교회당으로 알려진 이 건물은 벽돌 건축 공법이 일반화되지 않았던 때 도서지방에서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비용이 들어갔지만 주민들은 주위의 우려 섞인 시선을 깨고 대금을 다 지불한 것으로 전해진다. 금교령 폐지 이후 신앙의 자유를 누릴 수 있었던 노자키 섬의 주민에게는 믿음이 그만큼 절실했다.

그렇게 1908년 벽돌로 세워진 교회당은 앞으로는 바다를 바라보며 섬 중앙에 위치해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1955년까지 650명이 살던 이 섬은 1970년대 인구가 급감해 지금은 무인도로 남아 있다. 교회당 아래에는 폐교된 초등학교를 개조해 숙박이 가능한 와일드 파크가 조성돼 있고 일본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피정 시설로도 이용되고 있다. 섬에는 현재 700마리 이상의 야생 사슴이 서식하고 있다.

# 후쿠레 만두와 ‘후미에’ 대한 공감

노쿠비 성당 방문에 앞서 신가미고토 지역을 차량으로 이동할 때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소규모 마을이 높은 경사도의 산 중턱에 조금씩 뿌려진듯 위치해 있다는 점이다. 현지에서 순례길 안내를 인도한 이장주 선생은 “생존을 위해 섬으로 들어온 일본 그리스도교인들은 섬에서도 토착민에 밀려 경사가 심해 버려진 산 중턱에 살았다”고 말했다.

어업을 주업으로 하는 그 곳에서 해안가는 불교와 신도 신자들이 이미 장악해 그 곳도 피해 사람이 살거라 생각하지 않는 산 중턱으로 몸을 피해간 것이다. 260년간 금교령의 시대에 신자들은 그렇게 숨어서 잠복 그리스도교인으로 지냈다.

노자키 섬으로 가는 신가미고토 지역의 순례길에는 아직도 해안선을 따라 군데군데 세워진 교회당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도로도 없던 시절 외진 곳에 있는 그들은 도피 시 가져간 교회력으로 아직까지 성찬의식을 잊지 않고 있었다.

▲ 후쿠레 만두는 퍼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 중 8월 15일이 되면 성찬을 위해 만두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후쿠레 만두’다. 퍼진다는 뜻을 갖고 있는 ‘후쿠레’. 당시 신자들은 복음이 퍼져가길 기도하며 만두를 만들어 성찬을 기념했다.

후쿠레 만두는 전형적인 찐빵으로 바깥은 밀가루 피로 안은 단팥으로 소를 해서 만들고 완성 후에는 동백 꽃 잎으로 감싸 보관했다. 동백꽃은 성모 마리아를 상징한다. 순례에 참가한 기자단이 도착했을 때도 잠복 그리스도교 후손인 한 명이 나와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후쿠레 만두를 전했다.

노자키 섬으로 향하는 순례길에서 ‘후미에’와 관련된 이야기가 화제가 됐다. ‘후미에’를 앞둔 일본 그리스도교 신자에게 주님께서는 어떤 마음을 주셨을까 하는 이야기였다. 이 때 구교와 신교 기자가 같이 공감했던 점은 주님께서는 ‘나를 밟고 지나가라’고 말씀하셨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기자들은 당시 마음에 그 울림을 받은 신자들은 망설임 없이 모두 다 순교의 길을 택했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이를 증명하듯 나가사키에는 언덕에서 십자가형을 당한 26성인 외에도 화형과 참형 등 극형 앞에서도 대대로 신앙을 지킨 신자들이 많이 잠들어 있다. 나가사키 지역의 기독교 박해를 그린 소설가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에도 ‘후미에’와 관련된 장면이 등장한다. 저자는 ‘후미에’로 고통하는 신자에게 주님께서 ‘나는 세상에 밟히러 왔다고 말했다’고 전한다. 소설 ‘침묵’은 일본 가톨릭에서는 현재까지 금서로 지정돼 있다.

▲ 기독교 금교령 철폐 한 해 전인 1882년 세워진 에부쿠로 교회당은 나가사키 신가미고토 지역 내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교회당이다. 박쥐천장 모양으로도 유명한 이곳은 원인 모를 화재로 2007년 전소했지만 마을주민의 회의 끝에 2010년 5월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 에부쿠로 교회당

순례길을 인도한 일본나가사키 순례센터 이리구치 히토시 씨는 금교령 철폐 이후 일본 그리스도교는 구교로 돌아온 신자와 잠복 그리스도교인으로 분류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 중 일부는 모습을 아직도 드러내지 않고 잠복 그리스도교인으로 핍박의 세월을 기억하고 대비하고 있다.

▲ 에부쿠로 교회당 천장은 박쥐천장 모양으로도 유명하다.
신앙의 자유를 찾은 나가사키 일대에는 1890년부터 1930년까지 신앙의 전성기를 맞는다. 이때 이 일대에는 많은 성당이 세워졌는데 그 중 하나가 아리가와 항에서 45분 거리에 위치한 에부쿠로 교회당이다. 신가미고토 내 에부쿠로 지역 신자들은 금교령이 철폐되기 한 해전 구교로 복귀하며 모습을 드러낸다.

이듬해 금교령이 철폐되지만 심한 핍박이 계속됐고 그 영향은 4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게 이어져 내려왔다. 당시에 신앙을 갖는 것은 범죄와 마찬가지. 금교령 철폐 이전까지 신자를 발견, 신고하면 포상금을 준다는 방이 마을 곳곳에 붙어 있어 신자는 현상수배범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에부쿠로 신자들은 1882년 교회당을 세웠다. 이리구치 히토시 씨는 2007년 원인 모를 화재로 교회당이 전소될 때까지 에부쿠로 교회당은 신가미고토 지역 내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교회당이였다고 소개했다. 교회 전소 이후 재건에 대한 마을 주민간의 고민이 있었지만 2010년 5월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됐다. 박쥐천장 모양으로도 유명한 교회당은 당시 남은 뼈대를 보수, 그대로 건물을 올려서 불에 탄 기둥 흔적을 만나 볼 수 있다. 방문 시 교회 외관을 하늘색으로 도색하는 주민을 만날 수 있었는데 교회 우측 안쪽에 천장 대들보 하나를 도색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사고가 발생한 건물의 일부를 사고 때 그대로 보존하는 것은 일본인의 풍습이라고 설명했다.

▲ 국가중요문화제로 지정된 카시로가지마 교회당은 교회 전체가 바위를 잘라. 데츠카와 요스케가 건축한 이 교회는 무너지지 않는 교회를 바라는 성도들의 마음을 담아 건축자재를 바위로 택했다고 전해진다.

# 카시로가지마 교회당

발길을 옮겨 신가미고토 지역 내 국가지정 중요문화재로 지정된 카시라가지마 교회당으로 향했다. 교회가 위치한 곳은 급한 조류가 흘러 다리를 통하지 않고는 접근이 힘든 섬에 있다. 지금은 폐쇄된 공항 가는 길에 있다. 데츠카와 요스케가 건축한 이 교회당은 기둥이 없는 석조 건물이다. 교회당 전체가 바위로 만들어졌다는 점 또한 하나의 특징으로 무너지지 않는 성당을 세우기 위한 성도들의 바람을 건물에 담아 1919년 완공됐다. 바위 하나하나에는 그 때 새겨진 번호가 아직도 남아있다.

▲ 카시로가지마 교회당 내부 모습.
전도사 모리마쯔의 인도 아래 성도들은 섬에 있는 바위를 직접 잘라 나르거나 인근의 토모즈미의 바위를 잘라 성전 건축 자재로 사용했다. 교회당 건축 이전에 모리마쯔 전도사는 건설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 사택을 먼저 세웠는데 성당 좌측에는 건축물이 아직 남아있다.

순례길을 인솔한 이리구치 히토시 씨는 “일본 내에 이런 양식의 교회는 없다”며 “당시 신자들은 낮에 노동으로 봉사했고 밤에는 생활을 위해 바다로 고기잡이를 나갔다”고 전했다. 인근에는 고토 쿠주레 때 카시라가 섬 신자를 감금했던 옥사의 옛터를 확인할 수 있다. ‘후미에’가 있었던 당시 이곳에서도 성화 밟기를 거절한 성도들은 그 자리에서 색출돼 순교했다. 그리고 성화를 밟고 지나간 신자들은 집에서 스스로를 벌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성당 우측으로는 십자가로 뒤 덮힌 묘지를 확인할 수 있다. 신도나 불교신자와는 달리 자신의 묘지에 십자가를 세긴 묘역은 일본 전체에서 나가사키 지역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다. 교회당에서 3백여 미터 떨어진 앞에는 에메랄드 빛 해변이 펼쳐져 있다. 나가사키 순례단 일행은 일본 그리스도교인이 밟아온 역사의 궤적을 거슬러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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