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년 전 일본땅에 뿌려진 ‘순교의 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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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년 전 일본땅에 뿌려진 ‘순교의 피’
  • 이현주 기자
  • 승인 2010.12.01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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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라도·소토메에서 만난 순교의 역사 뭉클… 잠적 크리스천의 삶에 감동

● 박해와 순교의 땅, 일본 나가사키를 가다 - 상

일본 서남쪽에 위치한 나가사키현. 지금으로부터 461년 전, 이곳에 포르투갈 상선이 머물렀다. 무역을 위해 항해하던 이 배는 ‘복음’을 싣고 있었다.

낯선 서양인 신부에 의해 처음으로 ‘키리스도교’를 접한 일본인들은 ‘영혼 구원’이라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영원히 살 수 있다는 가르침도 어려웠다. 그러나 그들은 죽어서도 살 수 있는 부활의 신앙을 선택했다. 종교개혁보다 훨씬 이전에 동양의 작은 섬에 복음이 뿌려진 순간이었다.

‘동양의 로마’라고 불리는 일본의 ‘나가사키’는 슬프고 고통스러운 박해의 역사가 숨겨진 곳이다. 금교령의 위협 속에서도 신앙을 지키고자 했던 이들은 창칼에 찔리고 불에 던져지는 갖은 고통 속에서도 주님을 버리지 않았다.

죽음으로 혹은 은둔으로 자신의 신앙을 지켜온 일본 그리스도교의 역사. 그 역사의 현장은 일본 정부 지정 문화재와 현 지정 문화재 등으로 보존되고 있었다. 불교 국가 일본이 기독교의 역사를 보존하고 문화재로 관리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심지어 일본은 지금, 나가사키 순교지를 세계문화유산에 등재시키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 부끄러울 만큼 가슴 아픈 자신들의 종교 박해 역사를 일본은 세계가 함께 지킬 ‘문화유산’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가사키 순례센터는 박해의 유산을 한국 교회에 알리기 위해 신-구교 언론을 초청했다. 지난 24일부터 27일까지 나가사키 순례의 여정은 ‘박해’ 속에 담긴 주님의 뜻을 돌아보며 ‘평화’를 위해 기도하게 만든 시간이었다.                                                                <편집자 주>

▲ 히라도 야이자 공원에는 1621년 체포돼 화형을 당한 카미로 선교사의 기념조각이 세워져 있다.
24일 후쿠오카 공항에 도착한 일행은 차로 2시간을 달려 히라도에 도착했다. 예수회 선교사 하비에르가 1549년 일본에 도착한 후 1년이 지난 1550년 히라도를 찾아온 것으로 일본 기독교 역사는 시작된다.
타비라 교회당 인근에서 가장 먼저 찾은 기독교 유적은 ‘야이자 사적공원’ 이었다. 카미로 콘스탄츠오 신부의 순교비가 있는 공원에는 불타는 순교자의 모습을 형상화한 기념비가 세워져 있었다.

카미로 신부는 1605년부터 일본에서 복음을 전했다. 1614년 금교령 발령 이후 마카오로 추방됐지만 그는 1621년 다시 일본으로 잠입해 선교활동을 벌이다가 체포돼 타비라에서 화형을 당해 순교했다고 한다. 죽는 순간까지 일본어와 포르투갈어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는 카미로 선교사는 앞으로 만날 수많은 순교자들 중 한명에 불과했다. 그의 순교비 넘어 저 멀리 히라도섬에 세워진 하비에르의 기념교회가 보였다.


행복한 순교 선택한 ‘니시’
차를 타고 이키츠키대교를 건너 도착한 이키츠키섬에서 우리는 니시 부자의 순교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아버지 니시 겐카는 이키츠키 최초의 순교자다. 박해를 피해 숨어 지내던 니시 일가족은 이웃의 고발로 체포되어 배교를 강요당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위해서라면 생명을 버리는 것조차 아깝지 않다”며 “나는 정말 행복하다”는 말을 남기고 참수 당했다. 십자가가 서있는 묘지에서 예수님처럼 순교하길 원했던 니시는 비록 참형으로 사라졌지만 그의 돌무덤과 ‘쿠로세 쯔지’는 이 땅의 첫 순교자를 거룩하게 기리고 있었다.

그의 아들 토마스 니시 역시 순교자로 생을 마감했다. 박해를 알면서도 마닐라에서 신학을 마치고 돌아온 토마스 니시는 1634년 나가사키 16명의 순교자들과 함께 이름을 남겼다.

나가사키를 돌아보기 시작한 첫 날, 가장 놀란 것은 박해를 피해 숨어 지낸 크리스천들이 200년이 넘도록 자신의 신앙을 지켜왔다는 사실이다.

158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선교사 추방령을 발표한다. 그러나 크리스천들은 토요토미 정권의 눈을 피해 오오무라, 아리마 영지 안에서 신앙생활을 계속하고 있었으며 박해 속에서도 복음을 지키기 위해 온갖 힘을 쏟고 있었다. 1597년 니시자카 언덕에서 26명의 신자들이 십자가 처형을 당한 후 17~18세기를 거쳐 1873년 금교령이 해제되기 전까지 이어졌다.

▲ 가쿠레 키리스탄의 묘지에는 조약돌이 놓여있다.
그들은 ‘가쿠레 키리스탄’
신앙을 지키기 위해 숨어 지내던 신자들을 발견한 것은 1865년. 금교령이 해제되기 직전 서양 선교사들이 외국인을 위한 교회를 짓던 중 우라카미의 일본인들이 찾아왔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우리도 당신과 같은 마음입니다.” 정말 놀라운 순간이었다. 금교령 아래 200년이 넘도록 신앙을 지켜온 크리스천들이 있다는 사실은 기적에 가까웠다. 일본 교회사는 이 순간을 ‘신도발견’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후 숨어있던 크리스천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속속 그들에 대한 정보들이 드러났다. ‘가쿠레 키리스탄’이라고 불리는 이들은 사제가 없던 잠복시대, 각 지역에 지도자를 중심으로 공동체를 만들어 신앙을 지켜왔다.
이키츠키쵸 박물관에는 가쿠레 키리스탄의 자료가 잘 전시되어 있었다. 순교와 배교의 사이에서 고심하던 신자들은 목숨을 지키되 신앙도 이어가야 한다는 책임을 안고 있었다. 종교개혁 이전, 성경도 없던 당시 일본인 신자들에게 남은 것은 라틴어 구전 기도문과 예전문이 전부였다. 성상을 세울 수도 십자가를 걸 수도 없는 상황. 이웃의 눈초리를 피해 예배를 드리고 스스로 세례를 주며 명맥을 이어가는 것이 전부였다.

혹여 불교도와 이웃에 의해 ‘키리스탄’이라는 의심을 받게 되면 ‘후미에’로 자신의 모습을 감춰야했다. ‘후미에’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새겨진 목재 혹은 금속 성화로, 당시 일본 에도막부는 신자들을 색출하기 위해 ‘후미에’를 밟고 지나가도록 했다. 성화를 밟을 때 동요하거나 이를 거부하는 사람은 신자로 간주되어 체포되거나 처형을 당했다.

이키츠키쵸 박물관에는 후미에와 함께 성화를 밟고 집으로 돌아온 신자들이 자신을 때리며 회개했던 채찍과 꽃으로 위장해 벽면을 장식했던 작은 십자가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가쿠레 키리스탄의 일부는 19세기 들어 종교의 자유가 주어진 후에도 ‘은둔’의 신앙을 유지하고 있다. 또다시 찾아올 박해를 두려워해 신자임을 밝히지 않는 것이다. 일본 교회에서는 오랜 세월을 거치며 신앙적 변형을 겪은 가쿠레 키리스탄을 정식 기독교인으로 인정하 지 않지만 이들과의 만남과 복음으로 인도하기 위한 노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둘째 날인 25일의 여정도 가쿠레 키리스탄과의 만남으로 이어졌다. 쿠로시마 섬에 숨어 살아야했던 가쿠레의 이야기와 함께 깊은 숲 속에 지어진 순교자 바스챤의 움막을 접할 땐 가슴 깊은 곳에서 ‘한숨’이 흘러 나왔다.

▲ 바스챤의 은둔처와 그 안에 놓여진 십자가.
깊은 숲 속, 바스챤의 움막
바스챤은 소토메 지방 사람들을 보살피며 신앙을 지켜온 일본인 전도자였다. 수많은 가쿠레 키리스탄 중 바스챤의 이야기가 기억되는 것은 음력을 사용하던 일본인에게 교회력을 남겨 신앙생활을 유지할 수 있게 했다는 사실과 7대가 지나면 사제가 다시 올 것이라는 예언 때문이다. 놀랍게도 바스챤의 예언은 220년이 지나 이뤄졌다. 메이지 유신과 함께 일본이 개방되면서 선교사들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이 예언을 믿고 기다려온 가쿠레 키리스탄의 감동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숲 속 움막 안에 세워 놓은 십자가와 한켠에 놓인 화로와 물주전자는 자신의 몸 하나 누이기 어려운 2평 남짓한 움막의 실상을 보여주었다.

신앙을 지킬 것인가, 아니면 목숨을 지킬 것인가. 매일 살얼음 같은 위협 속에서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고 살았던 일본의 키리스탄들. 순교와 박해 속에서 갈등하다가 배교의 길을 결정하고 그들의 곁에 남았던 ‘침묵’(엔도 슈사큐)의 주인공 로드리고 신부처럼 ‘가쿠레 키리스탄’들의 신앙 역사는 깊은 상처로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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