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의 피가 뿌려진 곳에 ‘교회’가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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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의 피가 뿌려진 곳에 ‘교회’가 세워졌다
  • 이현주 기자
  • 승인 2010.12.08 13: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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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해와 순교의 땅, 일본 나가사키를 가다 - 중

▲ 후미에 박해가 있었던 곳에 신자들이 세운 우라카미교회당. 건축 당시 동양 최대 규모였으나 원폭 피해로 무너진 후 다시 재건했다. 사진 아래는 니시자카 언덕에서 십자가형을 당한 26인의 순교자들.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이들의 이야기가 전설처럼 내려온다.

숨어있던 신자들 자신의 손으로 교회 세우는 열정에 감동
26성인의 순교지 나가사키, 원폭 피해의 아픔도 남아 있어

소설가 엔도 슈사쿠는 그의 소설 ‘침묵’을 통해 나가사키에서 일어난 기독교 박해의 소식을 생생하게 전했다. 고통 받는 신도들을 위해 배교를 결정할 수밖에 없었던 로드리고 신부. ‘후미에’의 고통 속에서 신음하는 그에게 예수님은 “나는 밟히러 이 세상에 왔다”고 속삭인다. ‘왜 우리를 외면하느냐’며 외친 절규는 무의미했다. 예수님도 ‘박해의 고통’을 함께 받고 계셨기 때문이다.

죽음을 피해 배교로 위장하고 숨어 지낸 가쿠레 키리스탄이 세상 밖으로 나온 것은 1865년이었다. 히라도에서 뱃길로 40분을 달려 들어간 쿠로시마 섬은 가쿠레 키리스탄이 숨어지낸 곳이다. 선교사가 다시 일본을 찾았을 때, 이 섬에는 600명의 가쿠레 키리스탄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감격에 겨워 선교사를 찾아갔다. 200년을 넘게 지켜온 신앙의 힘은 하나도 줄어들지 않았다. 다시 기독교인의 삶을 선택한 이들은 선교사들과 함께 교회를 세웠고, 자녀들에게 대를 이어 믿음을 계승하고 있었다.

# 원폭의 아픈 상처, 나가사키
놀라운 것은 나가사키현 인근에 세워진 수많은 교회당엔 모두 성도의 정성이 담겨 있다는 점이다. 다시 주님을 믿을 수 있다는 감격은 선교사들을 도와 교회를 세우는 일로 이어졌고, 조개를 구워, 흙벽돌을 만들어, 혹은 나무의 결을 직접 그림으로 그려가며 교회를 완성시켰다. 그렇게 세워진 곳이 타비라, 오오노, 쿠로시마 교회당들이다.

나가사키현에 있는 우라카미교회당은 박해의 터에 세워졌다. 후미에(초상밟기)를 강압하던 촌장의 집터를 신자들이 사들여 그 곳에 교회를 세웠다. 1945년 원자폭탄이 떨어진 후 산산이 부서진 교회를 다른 곳으로 옮기자는 제안도 있었지만 신자들은 완강했다.

순례 길을 인도한 이장주 선생은 “박해의 씨앗이 뿌려진 곳에 교회를 세워야 한다는 신자들의 굳은 믿음은 절대 흔들리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결국 1959년 우라카미교회당은 박해의 장소에 신자들의 손으로 다시 세워졌다.

순례 셋째 날, 일행은 나가사키현 중심지를 돌아보았다. 박해의 상처가 깊게 남은 나가사키는 원자폭탄 투하로 도시 자체가 폐허가 되는 아픔을 또한번 겪어야 했다.

1945년 8월 9일 오전 11시 2분. 도시로부터 500미터 상공에서 폭탄이 터졌다.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던 폭탄의 위력은 도시 전체를 삼켜버렸다. 24만 도시 인구 중 15만 명이 죽거나 다친 이 끔찍한 전쟁의 역사를 나가사키는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었다. 피폭 중심지에는 공원이 세워져 있고, 당시 조선인을 가두었던 형무소 터도 남아 있었다. 폭심지에서 150미터 떨어진 곳에는 원폭자료관을 세워, 핵무기의 위험이 얼마나 큰지를 경고하고 있었다.

연평도의 포격 소리를 듣고 떠난 일본 순례길이 편치만은 않았다. 그리고 같은 시간 만난 일본전쟁의 역사는 가슴을 깊게 후벼댔다. 엄마를 잃은 아이들, 화상으로 앞을 볼 수도 없는 사람들, 새까맣게 그을린 시체와 도시를 가득 채웠을 비통한 울음소리를 생각하면 전쟁의 참상이 얼마나 혹독한 것인지 소름이 돋았다. 안타까운 것은 전쟁의 폐허 속에서 그들이 외치는 것은 핵무기에 대한 반발일 뿐, 자신들이 저지른 전쟁 범죄에 대한 사죄와 반성은 단 한마디도 없었다는 점이다.
원자폭탄의 아픈 기억을 뒤로한 채 일행은 다시 순교의 현장으로 향했다.

# 니시자카 언덕의 ‘26성인’
1597년 1월, 교토와 오사카에서 스페인 출신의 베드로 선교사를 포함해서 24명의 신자들이 체포됐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기독교의 확산을 막기 위해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신자들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24명의 신자들은 1월 9일 교토를 출발해서 한 달 만에 나가사키에 이른다. 니시자카 언덕 위 사형장으로 끌려간 것이다.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는 것도 어려웠지만 한쪽 귀가 잘리는 고통은 그들을 더욱 힘들게 했다. 12살 어린 소년부터 60세가 넘은 노인까지 800킬로미터에 이르는 박해의 길을 그들은 묵묵히 걸어왔다.

“신앙을 버리면 살려주겠다”는 회유도 통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얼굴에는 감사와 기쁨이 넘쳐흘렀다. ‘도대체 저들이 믿는 예수님이 누구길래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생길 정도였다.

니시자카 언덕에 도달한 그들은 십자가에 매달려 순교한다. 창에 찔려 피를 흘리면서도 박해자를 용서하고 구원에 이르는 길은 그리스도밖에 없음을 전한 미키 선교사의 마지막 설교는 지금도 신자들의 가슴을 울리고 있다.

▲ 나가사키 원폭자료관에는 당시 참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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