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을 두려워 한 그 땅에 다시 복음의 꽃이 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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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을 두려워 한 그 땅에 다시 복음의 꽃이 피길…
  • 이현주 기자
  • 승인 2010.12.15 16: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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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해와 순교의 땅, 일본 나가사키를 가다 - 하

▲ 1627년, 15명이 손가락이 잘린 채 차가운 겨울 바다에 던져진 시마바라 순교지(왼쪽). 그 아래는 나가사키 시내에 있는 고려교(오른쪽). 히데요시에 의해 일본에 끌려가 노예생활을 하던 조선인들이 모여살면서 신앙생활을 하던 곳이다.

나가사키 유적 세계 문화유산 등재 추진하는 불교국가 일본의 문화재 관리 놀라워

니시자카 언덕에서 사라져간 26성인은 일본의 첫 순교자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박해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거치면서 기독교 금교령 이후 18세기까지 30만 명이 넘는 선교사와 성도들이 체포되거나 순교하는 고통을 받아야 했다. 정말 끔찍한 대학살이 아닐 수 없었다. 이 박해를 기억하는 ‘가쿠레 키리스탄’ 중에는 아직도 자신들이 기독교인임을 숨기며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언제 박해가 다시 올지 모른다는 불안을 떨치지 못하는 것이다.

# 시마바라의 난
아이러니한 것은 히데요시의 박해 이후 곧장 금교령이 내려진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히데요시는 기독교의 확장을 경계하면서도 무역의 길은 열어놓았다. 나가사키 무역항에는 예수회, 프란치스코회, 도미니코회 등 10개 이상의 교회가 세워졌고, 신자들의 공동체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1614년 금교령이 내려지면서 일본의 기독교 박해는 더욱 잔인하고 광범위하게 진행됐다.

하비에르 입국 이후 30년 동안 복음은 동쪽으로 확장됐다. 당시 키리스탄은 10만 명이 넘을 만큼 성장했다고 한다. 시마바라 반도도 신학교와 수련소, 병원 등이 세워진 일본 그리스도교 중심지 중 한 곳이다. 기독교인 영주였던 아리마 하루노부가 있을 당시 마을은 평화로웠다. 하지만 새 영주 마츠쿠라의 등장은 주민들에게 고통으로 다가왔다.

마츠쿠라는 자신의 충신인 우치보리가 기독교 신앙을 포기하지 않자 일가족 4명과 기독교인 11명 등 모두 15명의 손가락을 잘라 추운 겨울 바다에 수장시켰다. 수영을 하지 못하게 하려고 손가락을 잘라낸 것이다. 순교자 중에는 다섯 살 난 어린 아이도 있었다.

박해 뿐이 아니었다. 새 영주는 성을 짓기 위해 노동력을 착취하고 막대한 세금을 걷자 주민들이 폭압을 참을 수 없다며 봉기하기에 이른다. ‘시마바라의 난’으로 불리는 이 민중봉기는 16살 소년대장 아마쿠사 시로의 지휘로 처음엔 승리하지만 막강한 무기를 지닌 12만 명의 에도막부 군사에게 대패하고 만다. 3개월 간의 전투로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살아남은 이들도 신앙을 지키다가 생매장을 당하거나 참수 당했다. 당시 죽어간 이들이 3만 여명에 이른다.

시마바라 난이 일어난 하라성 터에는 아직도 많은 인골과 십자가 등이 발굴되고 있다. 막부 군이 쏜 탄피로 십자가를 만들어 가며 신앙을 지켜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하라성 터 인근에는 옛 영주 아리마의 가신과 기독교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던 그 가족들이 화형을 당한 순교지가 있다. 1613년 8명의 순교자는 2만 명 이상의 신자가 지켜보는 가운데 한 줌의 재로 돌아갔다.

# 그들의 두려움은 ‘부활’
시마바라에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운젠은 땅 깊숙한 곳에서 품어내는 유황의 증기로 온통 후끈거리는 전형적인 온천지역이다. 일본을 찾는 사람들에게 운젠은 “온천이 좋은” 관광지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이 곳에도 박해의 이야기가 숨어 있다.

1627년 사제들을 따랐던 바오로 우치보리와 동료 순교자들은 이마에 ‘키리스탄’이라는 낙인을 찍은 채 운젠으로 끌려왔다.

키리스탄들은 펄펄 끓는 유황천에 빠지는 고문을 당했다. 그것도 모자라 상처를 내고 뜨거운 물에 담갔다 빼기를 반복했다. 정말 잔인한 박해가 아닐 수 없었다. 후미에를 거부한 사람들을 키리스탄으로 간주하고 운젠까지 끌고온 박해자들. 그러나 일본의 박해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그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느낄 수 있었다. 그들에게 ‘키리스탄’은 자신의 영향을 받지 않는 오직 하나님만을 믿는 두려운 존재였다. 그들의 두려움은 오오무라 박해에서도 찾을 수 있다.

시미바라의 난 이후 키리스탄이 없다고 믿었던 1657년, 오오무라 코오리 마을 한 동굴에 예배가 드려진다는 신고가 들어왔다. 그 신고로 608명의 키리스탄들이 검거됐다. ‘코오리쿠주레(코오리 박해)로 불리는 이 사건으로 411명이 참형을 당했다. 오오무라와 나가사키, 히라도 등 5개의 옥사에 나뉘어 갇힌 이들 중 오오무라에서 처형된 131명은 머리와 몸통이 다른 곳에 묻혀졌다. 쿠비즈카에서는 머리를, 도오즈카에서는 몸통을 찾아냈다. 왜 머리와 몸통을 따로 묻었을까 궁금해졌다.

순례 안내를 맡은 이장주 선생은 “키리스탄이 부활할 것을 두려워해 머리와 몸을 따로 묻었다”고 설명했다. 일본인들이 두려워한 것은 ‘부활’이었다. 그만큼 당시의 복음은 강력한 것이었고, 키리스탄들에게 영원한 생명에 대한 강한 믿음을 부여했다. 죽음을 앞에 두고도 박해를 피하지 않고 의연하게 맞섰던 이들의 용기는 ‘신앙의 힘’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 일본의 놀라운 문화재 보존

▲ ‘신도발견’의 역사를 안고 있는 오우라교회당. 일본은 가장 오래된 이 교회를 국보로 지정해 관리하고 있다. 오우라교회당은 일본의 세계 문화유산 등재 후보에도 올랐다.
3박 4일간 순례단이 다녀온 곳은 총 36곳이나 됐다. 하루 8~9개의 순교지를 돌며 일본 선교와 박해 역사를 새롭게 알게 됐다.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불교 국가 일본이 기독교문화재를 이처럼 소중히 보존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번 한국 ‘신-구교’ 기자단의 초청은 일본이 나가사키 박해의 역사와 유적을 유네스코가 지정하는 ‘세계 문화유산’ 등재 노력의 일환이었다. 일본의 기독교 역사는 우리보다 훨씬 앞서지만 남아 있는 유적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1864년 외국인을 위한 오오우라교회가 세워지고 1873년 금교령이 철폐된 후에야 건축이 본격적으로 진행됐다. 하지만 일본 정부와 나가사키현은 오오우라교회를 비롯한 7~8개 교회를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 신청했다.

나가사키 시내에 있는 오오우라교회는 1933년 국보로 지정됐다. 원폭 피해 후 국보에서 이름이 빠졌지만 1953년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로 국보 지정을 다시 받게 됐다. 오오우라교회는 ‘신도발견’이 이뤄진 곳으로 건축물과 함께 일본 기독교가 갖는 역사적 의미가 큰 곳이다. 지난달 26일 순례단이 찾아간 날도 일본인 관광객들이 오오우라교회를 보기 위해 몰려들었다.

1918년 세워진 타비라교회(국가지정 중요문화재)와 호오키교회당(현 지정 유형문화재), 1902년 축성한 쿠로시마교회당(국가지정 중요문화재) 등이 모두 문화유산 후보에 이름을 올렸다. 순교지에 대한 관리도 철저해 작은 무덤 하나 비석 하나까지 모두 정부에서 관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역사에 대한 기록과 보존 노력도 상세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우리나라 기독교 문화재들이 개발과 성공 논리에 파묻혀 하나둘씩 사라져가는 이때에 일본 나가사키 순교지는 일본 기독교 박해의 역사를 넘어 미래의 일본 문화유산으로 그 가치를 더하고 있었다. 지금 당장은 기독교의 교세가 미약하지만 세계 문화유산 등재는 일본 기독교에 상당한 자부심을 심어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가사키 순례센터 이리구치 씨는 “한국 기독교 순례지를 돌아본 적이 있다”며 “한국 교회는 더 크게 발달했는데도 순교지에 대한 개발과 보존이 미흡한 것 같다”며 아쉬워했다.

이리구치 씨는 “한국의 많은 기독교인들이 나가사키로 순례를 온다”며 “한국도 기독교 역사 유적지를 잘 발굴해 일본 교회 지도자와 일본 성도들을 순례의 길로 초청해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 기독교 유적 순례를 통해 일본 기독교가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 순례의 길, 평화의 길
가슴 아린 순례의 시간이었다. 어떻게 수십만 명의 기독교인들이 이토록 참혹한 박해를 견뎌냈는지 놀라울 따름이었다. 한편으로는 250년 이상, 7대에 거쳐 복음을 지켜온 ‘가쿠레 키리스탄’의 모습을 보면서 60년 전 복음을 숨겨야 했던 북한의 성도들이 떠올랐다.

북한에 교회가 정말 있느냐는 근원적인 질문이 아직도 한국 교회 안에서 오가는 가운데, 뜨거운 믿음으로 ‘동양의 예루살렘’이라 불렸던 평양과 북한 지역에서 교회가 완전히 사라졌을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 역시 박해를 견디면서, 듣는 귀와 감시의 눈을 피해 소중한 신앙을 이어가고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박해에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죽음을 받아들인 일본 키리스탄의 모습에서 주님의 평화를 잃어버린 우리의 조급한 신앙에 깊은 반성이 일었다.

박해의 피가 뿌려진 곳에는 교회가 세워진다. 복음의 불모지 일본도 예외는 아니었다. 지금 일본의 기독교 교세는 미약하지만 그들의 깊은 영성과 신앙은 우리가 배울 점이다. 죽음으로 지켜온 일본의 신앙 명맥이 언젠가 불꽃처럼 되살아나 일본인의 가슴을 뜨겁게 할 때가 올 것이다. 나가사키에서 멈춰버린 ‘믿음의 시계’가 다시 똑딱이며 일본 전역으로 확장될 날을 위해 기도하며 순례의 여정을 마쳤다.

▲ 일본은 기독교 유적을 모두 정부 또는 현에서 관리하고 있다. 나가사키 순례센터 이리구치 선생은 “한국의 기독교 유적 순례에 일본 성도들을 초청해달라”고 말했다. 사진 우측 왼쪽은 이리구치 선생, 오른쪽은 가이드와 통역을 맡은 이장주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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