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에서 ‘덜’로 패러다임 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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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에서 ‘덜’로 패러다임 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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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9.02.18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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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석찬목사<초동교회>


요즘 식탁에서 가장 많이 오르내리는 화제는 ‘금융위기’이다. 미국에서부터 일어나기 시작한 금융위기의 파도는 쓰나미에다 허리케인이 겹쳐서 엎친 데 덮친 것이라고 비유할 수 있다. 진도(震度) 8 이상의 지진이며, 여진(餘震)이 쉴 새 없이 일어나는 것과 같다. 미국이 2조 달러를 쏟아 붓고, 온 세계가 금리를 내리고 국가 공적자금을 쏟아 부어도 밑 빠진 독에 물붓기와 같다.

만나는 사람마다 죽겠다는 아우성이다. IMF때보다 더 심각하다고들 한다. 세계의 모든 나라들마다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온갖 정책을 만들며 난리를 쳐도 금융위기의 현상은 요지부동이다. 대기업이 직원을 감원하고, 초대형 회사들이 부도로 무너지며, 공장의 기계가 멈추어 서고, 사업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한숨을 저절로 푹푹 쉬게 한다.

그런데 참 이상하고도 이상하다. 거리에 나서보면 경제위기가 어느 나라 이야기인가 여겨진다. 거리마다 자동차의 물결이 끊임없다. 출퇴근 시간대의 정체가 따로 없이 온종일 짜증스럽게 이어진다. 도심의 휘황찬란한 불빛은 불야성을 이룬다. 음식점에서 버려지는 남은 음식의 양을 돈으로 환산하면, 여간 속상한 것이 아니다. 여전히 사무실에서 사용되는 종이는 기하급수적이다. 경제가 돌아가고, 위기가 극복되려면 소비가 높아져야 한다는 논리 때문일까?

인류 역사를 한 마디로 정리할 수는 없지만, ‘더’의 역사라고 정의해 볼 수 있다. 먹고 살기에 충분함에도 ‘더’ 소유하기 위하여 영토를 넓히는 전쟁을 일으킨다. 부족한 것이 없지만 ‘더’ 많은 것을 향유하기 위하여 권력을 행사하여 왔다. 에덴동산 한 가운데의 열매는 모두의 것이었다. 아무도 자기의 것으로 소유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런데 ‘더’의 욕심은 선악과를 따먹게 했다.

이 ‘더’에 대한 욕망이 죄를 낳고, 그 결과 죽임의 문화를 만들었다. 이것이 인류의 역사다. ‘더’의 중심에는 ‘이기(利己)의 나’만 있다. ‘나’만 잘되면 그만이라고 생각한다. 오늘의 ‘무분별한 탐욕과 무책임’(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취임사에서 언급된 시대 평가의 말)으로 빚어진 세계적 경제위기가 일어난 원인의 중심에 ‘더’의 욕망이 똬리 틀고 있다.

‘더’는 하나뿐인 녹색 지구별을 심각하게 유린하고 있다. 국가와 국가, 민족과 민족 사이에 갈등을 일으키고, 올바르고 평화로운 관계를 파괴한다. 인간의 멈출 줄 모르는 ‘더’의 욕심은 몇 만 불 시대라는 허구의 유토피아로 현혹하며 생태계를 파괴하도록 유혹하여 인류 스스로 파멸에 이르도록 한다. 아편과 같은 소비문화를 부추긴다. 인류의 문화는 늘 ‘더’를 추구해 왔다. 이에 대하여 종교들은 ‘덜’을 가르쳤다. 그런데 우리 시대의 위기는 종교까지도 ‘더’의 늪에 빠졌기 때문에 빚어지는 비극이라 하겠다.

여기에서 멈추어야 한다. ‘더’에서 ‘덜’로의 패러다임 대전환이 필요하다. 세계 제2차 대전에서 패전국이 된 독일 사람들은 전후 나라를 재건하는데, 3사람 이상이 모여서야 성냥불 하나를 사용했다고 한다. 우리도 6.25이후 가난의 시기를 어떻게 극복하였던가. 지금 우리의 살림살이는 충분하다. ‘더’ 필요하지 않을 만큼 넉넉하다. ‘더’는 사치이다. ‘덜’에 마음을 둔다는 것은 ‘너’를 생각하기 시작한다는 징조이다. ‘너’에 해당하는 이웃, 생명 세계, 하나 뿐인 지구의 생태계 모두를 살리고 아끼며 보살피는 삶이 ‘덜’에서부터 출발된다.

아! 괴롭다. 필자의 장롱에 입지 않고 모셔둔 수많은 옷이 부끄러워한다. 그리고 집을 나서며 자가용 운전대에 앉는 필자 자신의 습관에서 ‘덜’의 실천이 얼마나 어려운지 실감한다. 그래서 더욱 더 ‘더’에서 ‘덜’로의 패러다임의 전환이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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