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파묘’ 기독교적 해석(2)무속보다 경계해야 할 것 ‘육화한 정령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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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파묘’ 기독교적 해석(2)무속보다 경계해야 할 것 ‘육화한 정령신앙’
  • 최성수 박사(AETA 선교사)
  • 승인 2024.03.14 09: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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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수 박사의 영화 읽기]‘파묘’(장재현, 2024, 미스터리, 15세. 134분)

기독교인 정체성을 갖고 영화를 보았다면 마음이 무거웠을 것이다. 무속을 기반으로 영화 이야기가 전개되는 것은 설령 이야기 얼개라고 쳐도 영화는 무속보다 못한 기독교의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세대를 이어가며 겪는, 이유가 밝혀지지 않는 가족의 비극을 해결하기 위해 기도의 한계를 느껴 무당을 부르고, 교회 장로가 무속 신앙에 동조하고, 마침내 극일의 정점에선 오행의 상생상극 사상이 결정적인 힘을 발휘한다.

영화 ‘파묘’(장재현, 2024, 미스터리, 15세. 134분) 포스터.

항일 투쟁 과정에서 기독교의 역할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이점을 영화가 부정하는 건 아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전혀 다르다. 대형교회와 이름있는 목회자에게서 친일 발언을 듣는 건 흔한 일이 되었다. 친일파들의 관료 임명을 감행하는 정치인들이나 일제 강점기로 말미암은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사람이 아직도 많은데도 여전히 그들에 대해 부정적인 낙인을 찍고 삐뚤어진 시선으로 보는 기독교인들이 끊이지 않고 있다.

사실 기독교계 인사들의 이런저런 행태들을 보면 영화 속 기독교 이미지는 너무 사실적이라 그렇게 낯설지 않고 불편하지도 않다. 다만 무속의 힘과 작용에 관해서는 기독교인으로서 주의할 필요가 있다. 영화를 볼 때 주의해야 할 일이다.

영화 속 무속은 한국인의 정신과 심성 저변에 흐르는 무속을 대변할 뿐이다. 소재라는 말이다. 21세기에 실제로 무속의 힘을 믿거나 작용을 신뢰하길 기대하는 건 아니다. 실제로 이장을 했다고 해서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다. 아이의 상태만 좋아졌을 뿐 상주는 물론이고 가족 중 여러 사람이 죽어 나갔다. 굳이 감독이 기독교인이었음을 강조하지 않아도 된다. 영화 속 무속은, 극일의 주체는 타인도 아니고 강대국도 아닌 우리 자신임을 강조하는 장치일 뿐이다.

우리가 정작 두려워해야 할 건 육화한 정령 신앙과 그 작용과 영향력이다. 왜냐하면 기독교 신앙과 비교할 때 그건 성육신 신앙에 가깝고 성례전 신앙의 의미에서 매우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신앙이기 때문이다.

모든 만물을 하나님과의 사귐을 위한 매개로 여긴다. 성만찬 예전은 이걸 바탕으로 실천한다. 빵과 포도주는 하나님과의 사귐을 위한 매개일 뿐이지 그 자체에 신비로운 능력이 있는 건 아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의 몸은 성령을 모시는 곳이라 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말이다. 그래서 몸을 성전이라고 말했다.

천도교와 동학에는 시천주 신앙이 있다. 모든 사람은 하늘을 모신다는 신앙이며 사상이다. 육화를 지향하는 일본의 정령 신앙은 모든 만물이 신이라는 신앙을 갖게 하고, 이런 신앙을 바탕으로 일본인은 만물과의 관계를 중시하며 적어도 그런 제스처를 보인다. 그들의 언어 표현과 제스처에 물씬 묻어난다. 이런 의미에서 일본의 정령 신앙은 무속 신앙보다 더욱 강력한 잠재력이 있고 실제로 더욱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

기독교인에게는 우상숭배에 불과하고, 인간의 연약함과 두려움을 이용한 사교에 불과하다 해도 결코 간과해선 안 될 신앙이다. 왜냐하면 기독교 역시 성령의 임재를 믿고 있고 말씀의 육화를 믿기 때문이다. 우상숭배에 불과한 사람들은 나름 삶에서 결실을 보이고 사는데, 정작 정통으로 자부하는 기독교인에게 삶의 열매가 없다면, 달리 말해서 정작 삶에 미치는 영향력이 미미하다면, 기독교 신앙이 일본 무속 신앙보다 더 나은 점은 무엇일까?

최성수 박사.
최성수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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