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종교개혁의 신호탄을 쏘아올린 비텐베르크를 가다
상태바
[르포] 종교개혁의 신호탄을 쏘아올린 비텐베르크를 가다
  • 손동준
  • 승인 2023.02.21 00:0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500년 전 루터가 35년 이상 활동했던 주 무대
도시 곳곳에 '루터'와 협력자들의 흔적들 가득
화려하지 않지만 단단한 '성 교회' 모습 인상적
베를린 중앙역에서 고속열차 이체에(ICE)를 타고 루터의 고장 비텐베르크로 향했다.
베를린 중앙역에서 고속열차 이체에(ICE)를 타고 루터의 고장 비텐베르크로 향했다.

1월 12일. 독일의 고속열차 이체에(ICE)에 몸을 싣고 루터의 고장 비텐베르크(Wittenberg)로 향했다. 수도 베를린에서 출발한 열차는 50분 만에 기자를 비텐베르크역에 뱉어놓고 목적지인 뮌헨을 향해 도도하게 떠나갔다. 겨울의 한복판을 지나가고 있었지만, 날씨는 그리 매섭지 않았다. 미국에서는 갑작스러운 한파로 사람들이 큰 곤욕을 치렀다는데, 독일 동부 작센안할트주에 자리한 인구 4만 7천명의 이 작은 도시는 얼음이 녹고 봄의 기운이 고개를 드는 한국으로 치면 3월 정도의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얼었던 땅이 녹아 밟는 곳마다 푹신푹신했다. 역을 벗어나 첫 번째 행선지 ‘루터하우스’를 향해 걷는데, 하나뿐인 신발이 더러워지는 것 같아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조금만 더 추웠다면 눈이었을 겨울비도 우산 없는 여행자를 다소 서글프게 만들었다. 

‘비텐베르크’. 얼마나 많이 들었던 이름인가. 루터가 종교개혁을 시작한 곳. 개혁교회의 후예를 자처하는 한국교회에서도 지난 2017년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수많은 취재진을 이곳으로 파송했었다. 종교개혁의 역사적 숨결을 직접 느끼고 간 그들을 부러워했었다. 그 행렬에 끼지 못했던 아쉬움이 분명 내 안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축제가 끝난 유적지에서 마주한 것은 환희도 감탄도 아니었다. ‘나도 드디어 왔다’하는 이름 모를 감정뿐이었다.

사실 이번 비텐베르크행은 일종의 ‘덤’이었다. 스코틀랜드에서 언약도의 흔적을 담는 것이 출장의 주된 목적이었다. 유럽까지 ‘간 김에’ 종교개혁의 상징과도 같은 이곳을 ‘찍고 오는’ 것만으로도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앞선 일정에 체력을 소진한 탓도 있었을 터. 루터하우스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볍지만은 않았다.

 

루터하우스 전경.
루터하우스 전경.

 

박물관이 된 생가

마틴루터(1483~1546)는 아이스레벤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그러나 생의 대부분은 비텐베르크에서 보냈다. 그는 수도사였고 한 가정의 가장이었으며, 대학교수였다. 루터하우스는 루터가 35년 이상 활동하고 생활했던 장소다. 1508년 루터가 비텐베르크에 도착한 후, 처음에는 수도사로서 이곳에 살았고, 1525년부터는 가정을 꾸려 아내와 함께 머물렀다. 1883년 관람객에게 개방되기 시작했으며 오늘날에는 종교개혁사를 증언하는 명실상부 세계 최대의 박물관이 됐다. 

루터하우스 매표소 입구에는 루터의 공부방이 있던 탑의 토대가 그대로 남아 방문객들을 맞이한다. 첫 번째 전시실로 들어서자 500년 전 비텐베르크시의 전경을 담은 목판화와 현자 프리드리히의 초상화가 있다. 선제후 프리드리히는 하르츠 산맥의 은광으로부터 엄청난 이익을 얻었고 그 수익을 통해 1502년 대학을 세웠다. 선제후가 작센의 도읍을 이곳으로 옮기기 전까지 비텐베르크는 2500명이 거주하는 중소도시에 불과했다. 선제후의 명에 따라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가 이곳에 ‘검은 수도원’을 세웠고 루터가 바로 이곳에서 수도 생활을 했다. 

전시는 루터의 행적을 천천히 따라간다. 루터의 사상을 담은 그림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문제가 됐던 ‘면죄금고’, 이를 비판한 ‘루터의 설교대’와 그 핵심이라 할 수 있는 ‘95개 테제’에 이르기까지 사건의 흐름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 

루터는 1508년부터 비텐베르크 대학의 교수로 활동했는데, 1513년부터 1518년까지 네 번의 성서 강의를 했다. 그는 로마서를 읽고 중요한 깨달음을 얻었다. 기독교인은 오직 믿음을 통해 구원에 이른다는 것이었다. 일견 추상적으로 느껴지는 이 명제는 당시의 관념을 혁파하는 사상이었다. 이런 생각은 로마교황청의 면죄부 판매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졌다. 1517년 초부터 면제부를 비판하는 설교가 시작됐다. 마침내 1517년 10월 31일 루터는 95개 테제를 비텐베르크 성(成) 교회 대문에 내건다. 

1
루터하우스에는 루터가 사용했던 설교대(왼쪽)와 종교개혁의 원인이 됐던 면죄금고(오른쪽 위), 루터가 사용했던 맥주 잔 등이 1000여점의 유물이 전시돼 있다.

이밖에 현재 루터하우스에는 루터와 그의 가족, 함께 지냈던 대학생과 하인, 친구, 지인들의 흔적이 담긴 1,000여점의 유물이 전시돼 있다. 특히 나무계단 특유의 삐걱거리는 소리를 즐기며 올라간 2층 전시실에는 루터가 지냈던 방과 입었던 옷, 그가 즐겨 마셨다는 맥주잔까지 볼 수 있다. 루터의 잔 아래에는 “루터는 포도주를 좋아했지만, 그가 일상적으로 마신 음료는 맥주였다. 식사를 함께하던 사람들, 특히 그중 대학생들은 루터를 존경했다. 그들은 식사 도중 루터가 하는 이야기를 받아 적거나 그의 친필이나 가재도구들을 모았다”는 설명이 적혀 있다.

 

1
비텐베르크 시내 곳곳에는 루터의 초상화가 담긴 각종 현수막이 걸려 있어, 이곳이 '루터의 고장'임을 실감하게 했다.

 

그때 그 사람들

‘루터시 비텐베르크(Lutherstadt Wittenberg).’ 비텐베르크의 정식 명칭이다. 도시의 이름에서 느껴지듯 500년 전 루터 이후에 어떤 누구도 그에 비견할만한 명성을 남기지는 못한 것 같다. 종교개혁 500주년이 6년이나 지났지만 곳곳에 드리운 현수막에는 아직도 루터의 초상화가 박혀 있다. 비텐베르크를 상징하는 인물로 그나마 루터에 비견할만한 인물을 꼽자면 선제후 프리드리히와 루터의 아내 카타리나 폰 보라, 그리고 멜랑히톤 정도가 있다.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는 현명하기로 이름이 나 일찍이 ‘현공’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교양이 풍부하고 음악과 역사에 관심이 많아 비텐베르크를 예술 활동의 중심지로 만든 당사자이기도 했다. 열렬한 구교도였지만 카를 5세와 교황청으로부터 마틴 루터를 보호하고 그를 바르트부르크 성에 숨겨주었다. 자신이 세운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마틴 루터의 강의를 청강하기도 한 선제후지만, 초창기엔 루터의 사상을 ‘너무 급진적’이라며 우려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현공은 루터를 끝까지 비호했다. 종교개혁을 일으킨 사람은 루터였지만,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가 없었다면 루터가 '큰일'을 이루기 전에 이미 목숨을 잃었을 수도 있다. 

1
루터하우스 마당에 있는 루터의 아내 카타리나 폰 보라의 동상. 위풍당당한 자세로 집 전체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또 한 명 루터의 아내인 카타리나 폰 보라는 후대에 이르러 ‘여성 종교개혁가’로 재평가 받는 인물이다. 루터에 반대하는 시토수녀회 소속 수녀였던 그녀는 26세에 42살이던 루터와 결혼했다. 라틴어에 능통했던 폰 보라는 루터의 저작을 직접 읽었으며 프로테스탄트 신앙에 정통했다. 루터와 결혼하면서 루터하우스에 머물던 수많은 식솔을 먹여 살렸다. 루터하우스 마당에는 카타리나 폰 보라의 동상이 위풍당당한 자세로 집 전체를 바라보고 있다. 여성에 대한 편견과 억압이 상당했던 시절, 루터가 자신의 아내를 ‘비텐베르크의 샛별’로 칭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단순히 루터의 아내가 아닌 한 사람의 종교개혁가로서 더 많은 연구가 이뤄지길 바란다. 

루터하우스를 빠져나와 전설적인 ‘성(成)교회’로 향하는 길. 비텐베르크 광장에는 루터와 필립 멜랑히톤의 동상이 나란히 서 있다. 멜랑히톤은 루터의 제자이자 동역자였다. 21세의 나이에 비텐베르크대학의 헬라어 교수로 초빙된 그를 두고 미심쩍은 눈길을 보내던 이들이 많았다. 그러나 멜랑히톤은 ‘근원으로 돌아가자(Ad Fontes)’는 제목의 교수 부임 설교를 통해 의구심을 날려 버렸다. 그가 외친 근원은 성경의 원전, 즉 히브리어와 헬라어 성경이었다. 종교개혁의 핵심 구호 ‘성경이 말하는 참된 믿음으로 돌아가자’도 멜랑히톤에게서 시작됐다. 이밖에도 멜랑히톤은 중세의 잘못된 교리, 즉 죽은 사람에게 기도하는 행위, 믿음의 교리를 무시하고 기도하는 것 등을 바로 잡았다. 루터는 그를 매우 아꼈는데 “하나님이 보내주신 소중한 도구이자 나의 가장 소중한 필립”이라고 부르곤 했다. 

1
비텐베르크 광장의 루터 동상.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붙였다는 ‘그 문’을 보기 위해 광장을 지나 멀리 보이는 성교회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멀리 보이는 실루엣만 봐서는 성교회의 ‘성’이 ‘성스러움'(Holy)이 아닌 ‘궁전’(Castle)을 의미한다는 것을 실감하기 어려웠다. 유럽의 여느 궁전과는 달리 단조로운 느낌이 강했기 때문이다. 대신 종탑의 높이가 상당해서 비텐베르크 시내 어디서든 눈을 들면 교회가 어디에 있는지 파악할 수 있었다.
 

1
비텐베르크 시내 어디에서도 성교회의 종탑을 볼 수 있다. 종탑에는 루터가 쓴 찬송가 '내 주는 강한 성이요'의 가사 일부가 적혀 있다.

멀리서 볼 때는 그렇게 큰 건물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는데 가까이 갈수록 그 위용이 대단했다. 가톨릭교회의 화려함과 비교하면 부족한 느낌이 있었지만 무엇보다 단단하다는 인상을 줬다. 마치 교회가 지향해야 할 모습은 화려함이 아니라 단순하지만 단단한 진리임을 강변하는 듯했다. 특히 종탑에 적힌 문구가 인상적이었다.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 되시니”라는 문구가 동그랗게 새겨져 있다. 바로 마틴 루터가 지은 찬송가 585장 ‘내 주는 강한 성이요’의 가사 일부다. 종탑 위로 올라가서 비텐베르크 시내를 내려다 보고 싶었지만 운영 시간이 지나 발길을 돌려야 했다. 

성교회의 내부 모습. 예배가 없는 날이라 유난히 조용했다.
성교회의 내부 모습. 예배가 없는 날이라 유난히 조용했다.

대신 무거운 철문을 밀고 교회 안으로 들어가 봤다. 예배가 없는 시간이라 조명은 일부만 켜져 있었다. 우중충한 날씨 탓에 스테인드글라스조차 고요했다. 계절의 스산함에도 불구하고 역사의 흔적을 담은 교회답게 중후한 분위기가 충만했다. 정면의 십자가상과 그 뒤의 파이프오르간이 유난히 고풍스럽다.

다시 교회 밖으로 나와 그 유명한 ‘테제 문’으로 갔다. 문에는 1조부터 95조까지의 내용이 양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라틴어로 쓰인 이 글의 원래 제목은 ‘면죄부의 능력과 효용성에 관한 토론’이었다. 평상시 루터가 주장하던 것보다 오히려 비판의 수위가 낮은 글이었지만, 2주만에 독일어로 번역되어 신성 로마 제국 전역에 퍼지고 1달여 만에 유럽 전체 지역에 퍼지면서 종교 개혁의 신호탄이 됐다.

1
성교회 한쪽에 자리하고 있는 '테제 문'. 95개조 반박문이 양각으로 새겨져 있다.

바람이 강하게 불어 카메라를 올려둔 삼각대가 흔들거렸다. 추위때문인지 벅찬 감정 때문인지 왼쪽 가슴이 바르르 떨렸다. 겨울이라 일찍 떨어지는 해를 아쉬워하며 테제 문을 뒤로하고 다시 베텐베르크 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성교회 종탑에 적힌 가사 때문인지 ‘내 주는 강한 성이요’ 찬양이 머릿속에 흘렀다. 그래서일까. 처음 올때와는 달리 푹푹 빠지는 땅에도 너그러운 마음이 들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