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순교의 피 머금은 스코틀랜드 교회, 이제 술집으로 팔려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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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 순교의 피 머금은 스코틀랜드 교회, 이제 술집으로 팔려나가
  • 한현구 기자
  • 승인 2023.02.02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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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교회에서 한국교회의 길을 묻다(1)

스코틀랜드 사우스에어셔의 중소도시 에어(Ayr). 스코틀랜드 경제의 중심지 글래스고로부터 남쪽으로 1시간 가량 차를 몰다보면 도착하는 이곳에선 West Kirk(스코틀랜드 영어로 교회를 이르는 말)라는 간판과 함께 세월의 흔적을 간직한 웅장한 예배당을 만날 수 있다.

분명 교회 간판에 이끌려 문을 열었건만 내부의 풍경은 상상을 초월한다. 한때 경건하게 예배가 드려졌을 예배당은 시끌벅적한 술집이 되어 손님들을 맞고 있었다. 이곳의 진짜 이름은 West Kirk Wetherspoon Freehouse(일종의 펍). 유럽 특유의 예배당 건축 방식에 따라 드높이 세워진 강단은 이제 테이블로 채워져 전망 좋은 좌석이 됐다.

강대상에선 더 이상 엄숙한 말씀이 선포되지 않았고 교회라는 명사는 그저 술집 이름을 장식하는 단어에 지나지 않았다. 족히 수십 가지는 되어 보이는 주류가 나열된 메뉴판 한 켠에는 1845년에 지어져 1981년 문을 닫았다는 예배당의 과거가 기록돼 있었다. 자유로운 신앙을 위해 떠나온 성직자와 평신도들이 교회를 세웠으며 폐쇄되기 전까지 샌드게이트 교회로 불렸다는 교회의 역사가 왠지 모르게 쓸쓸해보였다.

언약도의 나라 스코틀랜드는 장로교의 본산지다. 종교개혁가 존 낙스가 스코틀랜드를 주시지 않으면 내 목숨을 거두어달라며 기도의 무릎으로 장로교를 창설했고 언약도들이 순교의 피를 흘리며 부흥을 일궜다. 장로교가 대다수를 차지하는 한국교회로서는 아버지 교회나 다름없는 곳이다. 하지만 지금 스코틀랜드의 하늘은 어둡다. 국민 대다수는 교회를 떠났고 복음화율은 한자리수로 추락했다. 순교의 피를 머금은 예배당은 술집으로, 혹은 예식장으로, 카페로 팔려나갔다. West Kirk Wetherspoon Freehouse는 오늘날 스코틀랜드 교회의 슬픈 자화상이다.

스코틀랜드 교회의 가슴 아픈 현실을 그저 남의 일로만 치부할 수는 없다. 빛나는 부흥의 시대를 지나온 한국교회 역시 스코틀랜드 교회의 전철을 밟고 있어서다. 젊은이들은 교회를 떠나고 기독교의 신뢰도는 바닥을 친다. 지난 영광에 취해 있다간 교회가 술집으로 변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이 곧 우리 주위에서 들려올지도 모를 일이다.

한국교회가 재도약할 길은 어디에 있을까. 해법을 찾기 위해 우리보다 앞서 이 길을 걸었던 스코틀랜드 교회를 찾았다. 스코틀랜드 수도 에딘버러에서 존 낙스의 종교개혁과 언약도의 흔적을 더듬어가는 동시에 현지 목회자와 신학교수를 만나 스코틀랜드 교회의 현주소를 물었다. 교회에 등 돌린 주민들 사이에서 한국교회 전통의 영성으로 고군분투하는 한인 선교사를 통해 희망의 불씨도 발견할 수 있었다. 지난 5~13일 스코틀랜드 교회의 어제와 오늘을 거닌 탐방 일정을 지면에 옮겼다. 일정 중 마르틴 루터의 열정이 아로새겨진 독일 비텐베르크도 방문할 수 있었다.

스코틀랜드 남부에 있는 도시 에어(Ayr)에서는 유서 깊은 교회가 술집으로 변해버린 현장을 발견할 수 있다.
스코틀랜드 남부에 있는 도시 에어(Ayr)에서는 유서 깊은 교회가 술집으로 변해버린 현장을 발견할 수 있다.

신앙 위해 왕에게 맞섰던 존 낙스

칼바람이 몰아치는 스코틀랜드의 겨울 가운데 보기 드물게 화창한 날씨였다. 에딘버러 공항에 도착했을 때부터 기자를 반기던 먹구름과 비바람은 종교개혁 탐방길을 위해 잠시 자리를 비켜줬다. 수백년의 역사를 간직한 고풍스런 건물들 사이로 햇살이 내리쬐자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졌다. 안내를 위해 동행한 이재국 박사(에딘버러 대학)와 서동준 목사(에딘버러 대학)도 스코틀랜드에서 좀체 보기 힘든 날씨라고 귀띔했다. 첫 번째 목적지인 세인트 자일스 교회까지의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도심 한복판에서 위용을 뽐내는 에딘버러 성으로부터 홀리루드 궁전까지 이어지는 약 1.8km의 내리막길은 로얄 마일이라 불린다. 예로부터 왕과 귀족들이 걸었던 길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스코틀랜드의 왕과 귀족은 평상시 홀리루드 궁전에서 생활하다 전시에는 로얄 마일을 이용해 에딘버러 성으로 피신하곤 했다.

에딘버러 성 정상을 찍고 로얄 마일을 따라 내려오다 보면 중후한 색감의 벽돌과 화려한 첨탑이 어우러진 세인트 자일스 교회를 만난다. 세인트 자일스 교회는 종교개혁가 존 낙스가 담임 목회를 하며 메리 여왕의 종교 탄압에 정면으로 맞섰던 곳이다.

존 낙스와 스코틀랜드 메리 여왕이 신앙의 자유를 두고 대립한 일화는 잘 알려져 있다. 존 낙스는 메리 여왕을 네 차례나 찾아가 격렬한 토론을 벌였다. 당시 영국은 입헌군주제가 도입되지 않은 왕정국가였음에도 단신의 목회자는 한 치의 물러섬도 없었다. 그는 가톨릭 대주교의 가톨릭 교회를 비판하는 설교를 하면 죽을 것이라는 위협에도 굴하지 않았다.

존 낙스는 아무리 국왕이라 해도 하나님의 법을 지키지 않으면 왕의 권위에 복종하지 않아도 된다고 믿었다. 때문에 그는 메리 여왕이 가톨릭 신앙을 고수하며 신교를 탄압하자 여왕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당당한 모습으로 일관했다. 메리 여왕이 유럽 전역의 군대보다 존 낙스의 기도가 더 두렵다고 한 것도 이 때문이다. 존 낙스가 죽자 제임스 6세의 섭정 모튼 백작은 여기 이 세상의 사람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두려워 한 사람이 묻혔다는 말을 남기며 애도했다.

이 같은 위대한 족적에 비하면 그의 무덤은 단출하기 그지없었다. 세인트 자일스 교회 뒤편 주차장으로 변해버린 공터 바닥에 그가 묻혀있는 자리임을 알리는 표시가 있을 뿐이다. 존 낙스는 자칫 자신의 무덤이 숭배의 장소가 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까 두려워하여 무덤에 이름조차 남기지 않도록 했다. 죽는 순간까지도 겸손함을 잃지 않았던 위대한 종교개혁가의 마지막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장로교의 아버지로 불리는 종교개혁가 존 낙스의 동상.
장로교의 아버지로 불리는 종교개혁가 존 낙스의 동상.

하나님과 혼인한 언약도

에딘버러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곳이 또 하나 있다. 언약도들이 신앙을 위해 목숨을 내놓았던, 이른바 지붕 없는 감옥이다. 지붕 없는 무덤은 로얄 마일에서 에딘버러 대학으로 내려 가는 길에 자리한 그레이프라이어 교회 뒤편에서 만날 수 있다. 그레이프라이어 교회 역시 언약도들이 하나님과의 혼인 예식인 언약식을 거행했던 언약도의 성지다.

17세기 당시 찰스 2세는 스코틀랜드 장로교 총회 무력화를 시도했다. 이를 위해 찰스 2세는 켄터베리 대주교가 만든 기도 예식서와 교회 예식서를 스코틀랜드 교회에 강압적으로 사용하게 하는 방법을 썼다. 장로교인들은 가톨릭 색채가 강했던 이 예식서와 개혁교회를 가톨릭으로 복귀시키려는 시도에 강하게 반발했다.

분노한 장로교인들은 1638228일 그레이프라이어 교회에 모여 하나님만이 교회의 주인되심을 선포하고 가톨릭 의식을 교회에서 추방하는 것을 골자로 한 국가언약(The National Covenant)에 서명했다. 이후로 이 서명에 동참한 사람들은 언약도(Covenanters)라고 불렸다.

세상 권력에 굴종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따르기로 선언한 맹세의 대가는 가혹했다. 강압적인 종교정책에 저항했던 언약도들은 이들을 진압하러 온 정부군에 패해 약 500명에 이르는 이들이 전사했다. 남겨진 포로는 1,200. 찰스 2세는 보란 듯 언약식이 진행됐던 그레이프라이어 교회 뒤편에 140cm 높이의 돌담으로 감옥을 지었다.

밤마다 비가 쏟아지는 스코틀랜드의 혹독한 날씨가 지붕 없는 감옥의 언약도들을 괴롭혔다. 탈출하고자 맘만 먹으면 얼마든지 벗어날 수 있었지만 탈옥은 곧 신앙을 포기하는 것과 같았기에 그들은 추위와 굶주림 속에 목숨을 잃는 길을 택했다. 마지막까지 목숨을 부지한 생존자들도 언약의 정신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아 처형되거나 추방됐다. 설명을 듣는 내내 가슴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코로나 팬데믹을 핑계 삼아, 혹은 피곤하다는 이유로 너무도 가볍게 교회로 가는 걸음을 주저하지 않았던가.

만약 스코틀랜드 교회가 언약도들이 지켜낸 순교의 신앙을 온전히 이어받았더라면, 그래도 예배당이 술집으로 뒤바뀌는 비극이 일어났을까. 스코틀랜드에 언약도가 있듯 우리도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당시 신앙을 지키기 위해 순교도 두려워하지 않은 믿음의 선배들이 있다. 이날 한국교회가 가야할 첫 번째 길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지붕없는 감옥에는 순교를 각오하고 신앙을 지켰던 언약도의 흔적이 남아있다.
지붕없는 감옥에는 순교를 각오하고 신앙을 지켰던 언약도의 흔적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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