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속 인물 : 배춘근 전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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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속 인물 : 배춘근 전도사
  • 승인 2004.07.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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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와 공산당에 항거하다가 기도하는 자세로 총살형

나라를 빼앗은 일제는 신사참배와 황궁요배로 갓 태어난 한국교회의 생명을 위협했다. 선교사로부터 전해진 기독교복음은 나이로 따지면 당시 고작 10세 안팎의 어린아이 수준이었지만, 하나님을 향한 저들의 열정은 성숙한 장년의 나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현재 전해진 일제와 공산치하의 기독교인들의 삶은, 마치 로마의 창칼 아래서 신앙을 지켜낸 카타콤의 순교신앙과 비교될 만큼 추앙받을 만 하다.

배춘근 전도사는 생명의 시간이 조금만 더 연장됐더라도 목사로서 사역할 기회가 충분했던 순교자이다. 하지만 목사로서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며 사느니 아직 전도사지만 복음을 위해 충실하게 살다가 순교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타당함을 일깨워준 사람이다.

배 전도사는 도산 안창호선생과 안중근 의사를 배출한 순흥 안씨 가문의 ‘안성은’이라는 여인으로부터 복음을 전해 들었다. 전도부인의 소임을 다하던 중 배춘근 전도사의 할머니가 복음을 듣고 손자인 배춘근에게 전해준 것.

배춘근 전도사 가문은 바로 그 때 큰일을 겪고 있었다. 9명인 배 전도사 남매들이 차례대로 죽었던 것 그것이다. 막내인 배전도사 위로 7남매가 죽자 여러 방법을 동원, 악귀를 쫓아내려는 시도가 계속됐던 터였다. 기독교에 호기심을 보였던 이유는 바로 잇따른 남매들의 죽음에 대한 절규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나 배 전도사는 기독교복음의 깊은 진리를 민족구원에 결합시키며 안씨가문의 애국신앙을 배양해갔다. 그런 과정에서 아버지 또한 사망하게 됐고, 처절한 복음전도 열정은 뜨거워만 갔다. 이런 가운데 배춘근은 일제의 징집명령을 받아 전쟁에 참전하기도 했고, 얼마 후 일본패망으로 귀향했다. 하지만 배전도사는 해방 직후 불어 닥친 공산당의 기독교핍박과 또 한 차례 싸워야만 했다. 배전도사는 평양보다 거리가 가까운 서울의 조선신학교에 들어가고자 성경학교 수준인 경성신학교에 입학하며 체계적인 공부에 돌입했다.

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은 목사의 꿈을 끝내 이루지 못하도록 만든 사건이었다. 6.25당시 고향에 돌아와 보니 공산당이 자신의 교회를 인민사무소로 사용하는 것이 아닌가. 심지어 교인 한 명이 미제의 간첩이란 오명을 쓰고 잡혀 있는 것이 아닌가. 배전도사는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그곳에 들어갔으나 간첩에 몰려 갖은 고문을 받다가 총살을 당했다고 한다. 그의 시신은 기도하는 자세로 이튿날 꼿꼿이 굳어진 상태로 교인들에 의해 맨 땅 그대로 묻혀졌다고 한다.

윤영호기자(yyho@uc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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