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속 인물 : 박경구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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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속 인물 : 박경구목사
  • 승인 2004.07.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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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당 전위조직 기독교도연맹 편입 강요 버티다 순교

격동의 시기인 1900년대 중엽은 신앙대로 살고자하는 많은 성도들을 무참히 짓밟은 고난기였다. 순교를 각오해야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던 당시의 상황은, 네로와 도미티안 황제시대 속에서 살며 카타콤신앙을 지키던 때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일반역사는 암흑기로 조명하는 1900년대 중엽은, 그러나 기독교 눈으로 볼 때는 신앙의 정절을 지킨 황금기로 해석할 만하다.

박경구목사는 바로 격동의 시기, 하지만 신앙의 황금기에 살다가 순교한 몇 않되는 순교자 증 한명이다. 박목사의 큰 아버지는 중국 산동성 선교사로 파송된 박태로목사로, 평양장로회신학교 5회 졸업생이면서 재령읍교회를 시무했던 박태화 장로(박경구목사의 부친)의 형이다. 박경구목사는 큰 아버지 박태화목사의 권유로 기독교를 믿기 시작한 독실한 신앙가문의 출신이다. 숭실중학교와 숭실전문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할 만큼 교육에 지대한 열정을 가진 것으로 전해진다.

학교졸업 후 목사안수를 거부하고 교육계에 투신한 박목사는, 황해도 경산학교 교사로 부임한 이후 덕성학교 교장에 취임하게 되지만, 3.1운동에 가담한 전력이 있는 박목사의 취임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어 교육계의 한계를 느낀 그는 만주사변이 일어난 1931년 평양신학교에 입학, 안수 과정을 거치며 애국신앙을 견지하게 된다. 졸업 후 서부교회로 부임한 그는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일제의 협박을 거절했으나 새로 옮겨간 겸이포중앙교회에서 조차 일제에 시달려야 했다. 결국 사임. 농촌에서 고심하고 있을 때 한 가지 조작된 사건이 터졌으니 그것이 ‘정방산 비밀결사사건’이다. 박목사와 친분있는 사람들이 기도원에 모여 수양회를 한 것을 이렇게 꾸민 것이다. 당연히 구속.

하지만 해방의 기쁨을 맞은 박목사는 또 다시 공산당의 협박에 새로운 시련을 견뎌야 했다. 기독교연맹을 조직한 공산당이 교회들을 산하 조직에 가입시키려 협박, 갈수록 어려움이 더 커졌다고 한다. 회유와 강경, 반복되는 공산당의 강요를 견딘 박목사는 어느날 공산당으로부터 ‘중대한 의논’을 구실로 연행 당했다. 그것이 마지막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모진 고문 끝에 순교하고 말았다. 그 날이 바로 1950년 6월25일이었다.

윤영호기자(yyho@uc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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