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세운동 현장에서 믿음의 딸은 ‘부모’를 잃었다
상태바
만세운동 현장에서 믿음의 딸은 ‘부모’를 잃었다
  • 병천=이인창 기자
  • 승인 2019.02.20 08:5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르포] 박충순 전 유관순연구소장이 들려준 ‘진짜 유관순’ 이야기

3.1절이 되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이름 유관순. 천안 아우내(병천)장터에서 만세운동을 벌였고 서대문형무소에서 19살 꽃 다운 나이에 순국한 선열. 덧붙이자면 기독교 학교 이화학당을 다녔다는 정도가 아는 전부였다. 대부분 사람들이 아는 정도가 아닐까? 

백석대 유관순연구소가 설립된 20년 전부터 유관순과 관련된 다양한 연구에 참여해온 박충순 교수를 지난 7일 만났다. 이번 달 퇴임하는 박 교수는 유관순의 신앙과 삶, 우리가 몰랐던 역사를 풍성하게 풀어주었다. 천안향토문화연구원을 돕고 있는 문만주 은퇴목사가 동행하며 사진촬영을 해주었다. 

▲ '아우내 독립만세운동 기념공원' 내 조형물. 1919년 4월 1일 아우내만세시위에서는 유관순 열사의 부모를 비롯해 19명이 순국했다.

“1919년 아우내 장터, 다른 곳이었다”
전국적으로 유명한 순대 명소에 온 만큼 길가에 늘어선 순댓국집 한곳에 들러 뜨끈하게 점심을 해결한 후 발걸음을 옮겼다. 박충순 교수가 처음 이끈 곳은 병천면 한복판이 아니라 인근 들판이었다. 천안에서 병천면으로 들어오는 입구와 그 주변이 1919년 4월 1일 유관순 열사와 주민들이 만세시위를 벌였던 곳이라는 설명이다. 

사실 많은 사람들은 처음 만세시위가 일어났던 곳을 현재 시장터로 알고 있고 지금도 많이들 찾고 있다. 하지만 박 교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현재 시장은 수차례 물난리가 나면서 이전이 이뤄져 1920년대 만들어진 곳입니다. 유관순연구소가 초창기 향토사학자와 함께 일제 관보와 지적도를 연구하면서 밝혀낸 것인데, 아직까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고 안내판조차 없어 안타깝습니다.”

1948년 개봉한 윤봉춘 감독의 영화 ‘유관순’의 촬영지가 지금의 장터를 배경으로 했기 때문에, 사람들의 기억에서 옛 장소가 잊힌 것으로 추정된다. 1948년도 만세운동 이후 30년이나 지난 때였다. 

직접 장터와 주변 상가를 들러봤을 때도 일본식 건축양식이 그대로 남아 있어 오해할 법 해 보였다. 주민들조차 현재 장터를 만세운동 진원지로 아는 경우가 많아, 학계에 보고된 사실이 일반인들에게 확립되기까지는 시간이 더 걸릴 것으로 보인다. 

1919년 4월 1일 12시 일제히 만세를 불렀을 때 사람들은 얼마나 두렵고 벅찼을까. 당시 만세 시위대는 장터에서 일본 헌병주재소 방향으로 전진했다. 무려 3천명이 운집해 한걸음씩 나아갔다. 헌병들이 총구를 겨누고 총탄이 날아들 때도 태극기를 흔들며 평화적으로 저항했다. 

장터지에서 4차선 길을 건너면 곧바로 ‘아우내 독립만세운동 기념공원’을 만나게 된다. 유관순은 이곳에서 아버지 유중권과 어머니 이소제를 일제 총탄에 잃었다. 유관순이 부모의 죽음을 눈앞에서 목격했을 때 심경은 처절함 그 자체였을 것이다. 이날 아우내에서는 19명이 순국하고 30여명이 중상을 입었다. 

▲ 잘못 알려진 현재 아우내장터 모습과 1919년 아우내 장터 추정지(오른쪽)

과거 역사와 현재가 만나는 추모각
박충순 교수와 문만주 목사와 함께 문화원 앞에서 다시 차를 타고 5분 정도 이동해 유관순열사기념관과 추모각을 찾았다. 산 중턱에 꽤나 너른 공간에 꾸준히 사람들이 찾는 듯했다. 병천면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유관순 열사의 생가는 산 뒤편이라고 박 교수는 미리 이야기해 주었다. 

우리는 잠시 추모각에 올라가 묵념했다. 100년 전 아우내의 풍경이 잠시 희미하게 그려진다. 박 교수는 “지금 보고 있는 영정이 표준영정인데 과거와 차이를 알겠냐”고 질문했다. 분명 차이가 느껴졌지만 설명하기는 어려웠다. 

“서대문형무소 수형기록부 사진을 보고 그려져 2007년 지정된 세 번째 표준영정입니다. 과거에는 서양 사람처럼 이목구비가 선명했지만 지금은 실물과 가깝게 그린 것이죠. 당시 복식 양식처럼 위아래 의복을 모두 흰옷으로 그렸고, 만세운동을 준비하며 국기봉까지 만들었다고 보기 어려워 지금은 없앴습니다.”

유관순 열사의 출생일과 사망일, 언급했던 시위장소 등 여전히 이설들이 많지만, 그럼에도 작은 역사적 진실이라도 확립해가기 위한 노력은 계속되고 있었다. 한눈에 보이는 아우내는 어두웠던 역사가 없었던 듯 따스한 오후 햇살이 비추고 있었다. 

유관순 탄생 100년을 기념해 조성된 기념관에는 재판기록물, 호적등본 등 유관순 관련 사료들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박충순 교수는 유관순 열사의 뜨게모자가 문화재로 지정되지 못한 데 많이 아쉬워했다. 매달리고 매달려 기증받았지만 증언만으로 안 된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설명에서 그가 얼마나 치열하게 유관순에 매달렸는지 느껴졌다. 진품은 백석대 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 유관순 열사 추모각 내에는 2007년 지정된 표준영정이 보다 세밀한 고증을 거쳐 실물에 가깝게 그려졌다. 표준영정으로는 세번째이다.

유관순 애국정신 배경은 신앙적 가풍
기념관에서 나와 다시 차를 타고 산 뒤편 유관순 복원 생가와 용두리마을(옛 지령리마을)로 이동했다. 생가 옆에는 100년 전 만세운동의 중심축이 되었던 매봉교회(당시 지령리교회)가  있다. 마을은 고흥 유 씨 집성촌이기도 했지만 독립운동가 조병옥 박사를 배출한 곳이기도 했다.

박 교수가 차에 내리자 또 오셨냐며 주민들이 그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길에서 만난 한 주민은 유관순 열사의 일가(一家)였다. 유헌상 씨(71세)는 “유관순 열사와 집안이 만세운동에 참여한 이후 친지 20여명이 징용을 갈 정도로 집안의 피해도 컸다”고 어른들에게 들었다는 이야기들을 전해주었다. 

지나가던 승합차가 멈췄다. 매봉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박윤억 목사가 박 교수를 보고 다가왔다. 박 목사는 매봉교회 1층에 만든 유관순 열사 기념관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내부는 재정비가 필요해 보였다. 박 목사는 유관순 열사가 독립운동을 주민들에게 설명할 때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인근 작명교회의 나무 강단을 보여주었다. 독립기념관에서 개최한 3.1운동 100주년 기념전시회를 할 때 보내진 바도 있다. 

▲ (위) 매봉교회 박윤억 목사와 박 교수, 후손 유헌상 씨가 유관순 열사와 마을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아래) 유관순 열사의 복원생가 옆에는 옛 지령리교회를 잇는 매봉교회가 자리하고 있다.

박윤억 목사는 “지령리교회는 1902년 스웨러 선교사가 설립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최근 박해숙이란 인물이 세운 기록을 미국감리교 본부에 보관된 회의록에서 찾아냈다”며 “아직도 연구해야 할 부분이 많은데 교단의 꾸준한 관심이 부족한 것 같아 아쉽다”고 했다. 

역사는 유관순을 기억하고 있고 그의 삶은 대단했다. 일제는 서울에서 3.1운동을 보고 태극기를 만들었던 유관순을 주동자로 지목했지만 고향 어른들이 시위를 계획하고 유관순에 의해 구체화 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지령리교회는 유관순의 조부 유윤기, 조병옥의 부친 조인원이 이끌었고 자연스럽게 유관순은 참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박충순 교수는 “유관순에게 남달리 강한 애국정신이 깃들게 된 것은 그녀의 기독교 신앙적 가풍과 당시 많은 애국적 사건들로부터 받은 영향이 지대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서울 이화학당과 정동교회에서 배운 신앙과 동료들 역시 큰 영향을 미쳤다. 

체포된 유관순 열사는 공주지방법원과 경성복심법원을 거쳐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 유관순은 1920년 3월 1일 3.1운동 1주기 옥중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했다. 단순히 형무소 안에서만이 아니라 사실이 알려져 서울 전역에서 다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결국 형무소 안에서 극심한 고문을 당해 방광이 파열됐고 그 후유증으로 1920년 9월 28일 순국하고 말았다. 

약 4시간에 걸쳐 유관순 열사와 관련된 사적지들을 돌아보며 스스로 유관순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다. 

돌아오는 길에 박 교수에게 양해를 구하고 첫 만세시위가 있었던 장터 추정지에서 다시 차를 세웠다. 아침에 매서웠던 바람은 오후 햇볕이 버무려졌는지 푸근해진 느낌이다. 지금은 아무 것도 없는 들판을 기억하기 위해 사진에 담았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