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안주 거부한 애국신앙인, 대적세력 물리치며 복음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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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안주 거부한 애국신앙인, 대적세력 물리치며 복음전파
  • 승인 2004.03.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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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풍목사와 조만식장로는 누구인가

성경에 나타난 신앙인들의 공통점은 자신들이 살아가던 나라의 상황에 굉장히 예민하고 민감한 태도를 취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눈에 보이는 안락함과 평안함만을 추구했을 때 성경 속 인물들은 과감히 ‘회개’를 촉구하며 하나님의 사랑 속으로 복귀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었다. 노예의 삶으로부터 기적적으로 구출된 이후 황량한 광야 40년을 지나 왕권제도가 창궐해서 이방족속으로부터 군사적인 위협을 받으면서도 약 400년간 왕권제도를 도입하지 않고 하나님과 교통하는 이른바, 사사들의 통치를 받은 이스라엘의 역사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 예민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던 신앙역사의 결정(結晶)이었다.

이같은 신앙태도는 꼭 성경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도 하나님나라만을 사모하며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현실의 모든 변화에 민감한 삶을 살았던 인물들을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다. 한국복음주의협의회가 재조명하는 이기풍·조만식 두 인물은 성경에서 발견되는 수다한 신앙인들의 삶의 궤적과 동일한 선상에서 바라보아도 충분할 만큼 애국신앙을 담지하고 있다. 우선 이기풍목사는 한국 초대 기독교회사를 이끈 7인 목사 중 한 사람이란 측면에서 의미가 크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조직된 독노회의 목사로 안수받은 그는 서경조 길선주 양전백 한석지 방기창 송린서와 함께 최초 7인목사로 이름을 올렸다. 이기풍 목사는 전도하는 마펫선교사에게 돌을 던지며 박해를 가했던 한국의 사울이다.

이기풍목사는 제주도에 이어 전남 광주와 순천 고흥 벌교 여수 완도 등을 순회하며 복음이 필요한 곳은 어디든지 달려가는 부지런하고 책임감 강한 삶을 펼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일제에 합병된 우리나라 상황 속에서 신앙을 지키는 일이 애국과 깊은 관계가 있음을 깨달은 그는 1936년을 계기로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일본 경찰에 늘 반대입장을 분명히 한 죄목으로 1938년 구속된다. 이 해는 한국 장로교단이 신사참배를 교단결의로 결정한 해이기도 하다. 온 교회가 우상숭배로 등을 돌릴 때 이기풍목사는 하나님의 품을 선택했던 것이다. 모진 고문으로 노쇠한 그는 병보석으로 출감했지만 이기기 힘든 탄압 때문에 1942년 별세하고 말았다.

다음으로, ‘한국의 간디’로 우리들에게 잘 알려진 조만식장로는 비폭력 무저항을 주창했던 간디의 영향을 받아 우리나라에서도 그같은 사상을 강조한 인물이다. 소련군정청이 북조선인민정치위원회를 설치하고 그에게 위원장자리를 주면서 찬탁운동을 권유했던 것을 계기로 조만식장로는 ‘조선민주당’을 창당, 당수로서 반공운동과 반탁운동을 주도하다가 6.25한국전쟁 당시 월남을 권유하는 측근들의 간청을 뿌리치고 결국 평양형무소에서 처형의 길을 선택했다. 발빠른 증가와 괄목할 만한 부흥을 체험한 한국교회는, 이제 세계정치 군사적 흐름을 민감한 태도로 주시하며 애국신앙의 길을 모색해야할 도상에 서 있다고 지적받고 있다. 그리스도를 옹호하는 성경적 애국신앙의 길을 되짚어보는 한국복음주의협의회의 이번 발표회는 그래서 의미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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