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속화의 흐름 속에 생기의 바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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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화의 흐름 속에 생기의 바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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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5.03.17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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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의 예술을 향하여 - 시어벨트(Seerveld)의 개혁주의 미학 (41)
▲ 안용준 목사

이 시대를 진단할 수 있는 가장 심각한 용어 중 하나가 ‘세속화’(secularization)이다. 이것은 로마서 12장 2절에 나오는 ‘세상을 본받는 것’의 개념과 거의 유사한 것으로 이해된다. 여기서 세속화의 주체인 세상에 사는 사람들의 삶은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작용하여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전 세계의 사람들을 몰아가듯 영속적인 현상으로 극에 달하고 있다. 예를 들어 대중문화와 예술의 세속성은 삶의 의미를 상실시킬 정도로 파괴력이 있다. 테크놀로지의 놀라운 발전은 모든 것을 상품화하고, 사람들은 그것을 즐기면서도 진정한 기쁨이나 행복을 느끼지 못하고 소망을 상실한 피곤한 방황을 지속하게 된다. 세속화된 문화와 예술이 인간의 궁극적 관심에 대답하고 역사 발전의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세속화된 문화와 예술에 생명의 바람을 일으킬 뚜렷한 방법이 존재하는가? 주님께서는 에스겔 37장의 계시를 통해 이미 우리에게 세밀한 그림을 보여주셨다. 어느 날 에스겔은 주님의 권능으로 해골의 잔해가 가득한 계곡에 놓여진다. 그리고 환상에 대한 해석을 받는다. 이스라엘은 미래가 보이지 않는 절망에 빠져있다는 것이다. 그곳에는 생명이 전혀 없다. 그 순간 에스겔은 뼈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뼈들은 서로 연결되어 힘줄이 생기고 살이 붙는다. 최종에는 그곳에 생기에게 명하여 생명이 없는 육체에  들어갔을 때, 어느 누구도 만들어 낼 수 없는 미래가 창조된다.

세속화로 치닫는 죽어가는 공동체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다. 그들의 특징은 인간의 세속화와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로 문화 창조의 방향성을 잃어버리게 한다는 것이다. 또한 세속화를 가속시키는 자기중심성(ego-centricity)은 개인적 혹은 집단적 이기주의 문화를 범람케 하며 자기 파괴적인 경향을 초래할 뿐이다. 이제 오늘날의 혼란스런 문화적 환경 가운데서, 기독교 신앙의 내면적이며 영적인데 그치지 않고 삶의 영역에 적용시키며 그 분야를 회복시켜야 한다는 생명의 개혁주의 문화관을 확립해 가는 크리스천을 소개하고 싶다.

먼저 니콜라스 월터스토프(Nicholas Wolterstoff)이다. 그는 포스트모더니즘과의 적극적인 대화로 주어진 시대의 모든 도전에 임한다. 특히 개혁주의 입장에서 많은 이들의 가슴에 새로운 문화의식을 일으킬만한 생기를 불어넣고 있다. 다음으로 알빈 플랜팅가(Alvin Plantinga)는 현재 벌어지고 있는 세계관의 치열한 논쟁들을 서구 문명의 ‘영혼’을 놓고 벌이는 전쟁터에 비유하고 있다. 종합하여 알버트 월터스(Albert Wolters)는 기독교세계관 운동의 강력한 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것은 어거스틴(Augustine). 종교개혁가 틴데일(Tyndale)과 칼빈(Calvin) 그리고 카이퍼(Kuyper)의 뛰어난 전통을 잇는 업적으로 평가될 정도다.

시어벨트에 의하면 ‘크리스천’이란 그에게 더욱 풍성한 생명을 허락하시기 위해 언약을 체결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고백하며, 삶의 각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분명히 드러내기 위해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 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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