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 선교사들의 전도와 교회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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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선교사들의 전도와 교회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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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4.08.20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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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우드는 신혼여행으로 두 달 동안 1,600킬로 전도여행

호레이스 엔 알렌은 그의 ‘조선견문기’에서 자신이 어의의 자격으로 인해 개인적으로 왕족과 친분을 쌓을 수 있었던 것을 밝힌다. 그는 명성황후 민비의 치료로 더욱 신뢰를 쌓았다. 알렌은 자신이 의료선교사로 시작하여 미국의 전권공사로 끝난 자신의 삶을 ‘묘한 인생길’로 묘사하였다. 의료 선교사로 3년, 관직에 3년, 그리고 조선주재 미국공사관의 서기관으로 시작하여 전권공사로 마칠 때까지 미국 정부의 외교관 자격으로 15년을 한국에서 보내면서 프로테스탄트 선교에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었다.

1908년에 쓴 그의 글 ‘조선견문기’에서 당시의 조선의 선교가 “성공한 모든 나라들 중에 으뜸”이라고 평가하였다. 그의 눈에 유교는 “하나님이 없는 도덕제도”에 지나지 않았고 사회적으로 “불교는 명성이 떨어졌다.” 당시 조선에는 종교적 진리의 전파와 단체의 조직을 반대하는 계급제도가 없었던 것도 그리스도교 선교의 성공 요인으로 보았다. 조선인들은 관리들의 압박을 받아왔는데 그리스도교가 이러한 문제를 평등화할 기회를 주었기 때문에 조선 사람들에게 호소력을 갖게 되었다. 당시 한국을 방문했던 선교사들은 “상류계급의 선교사들”이었다. 선교단체들은 대학을 졸업했고, 더욱이 남자 선교사들은 신학교나 의과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어학연구와 통역, 번역, 일반문학에 특별한 학식을 갖고 있었다. 어떤 선교사들은 자신들이 한국인들의 대서를 시켜 황제에게 편지를 보내, 황제가 회개할 것과 참회에 대하여 황제에게 설교할 기회를 달라고 요구했던 것을 뒤 늦게 후회하였다.

1885년 6월 28일 선교사들은 알렌의 집에 모여서 처음으로 예배를 드렸다. 알렌부부, 헤론부부, 스크랜턴의 부인이 참석하였다. 1886년 가을부터는 미국 공사관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였다. 몇 주일이 지나지 않아서 미국과 영국인들이 15-20명쯤 참석하여 예배하게 되었다. 미국 공사 윌리엄 파커는 이 사실을 정부에 통고했으나 정부는 반대를 표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정부 관리들은 집회를 금지하도록 종용했다. 예배를 금하는 이유는 외국의 세력들이 종교를 통하여 정치적인 간섭할까를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기회를 얻는 대로 복음을 전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우선 그들 주변부터 전도하였다.

1886년 6월 11일 노도사(魯道師)로 알려진 노경춘이 처음으로 언더우드 목사에게 비밀리에 세례를 받았다. 1887년에 접어들어서 배제학당 학생 한 사람과 한 관리가 아펜젤러의 저택에서 있었던 성경공부에 참여하였고, 학생은 같은 해 6월 24일 아펜젤러의 집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그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성경공부에 참여하는 자들이 많아지면서 자그마한 초가를 사서 예배처소로 활용하게 되었는데, 이로서 한국 최초의 감리교회인 정동교회가 설립되었다. 1887년 10월 8일 한국인 신자들은 아펜젤러의 집례 하에 처음으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언더우드 역시 다방면의 선교사업을 추진하면서도 노방전도에 열심이었다. 1887년 9월27일 언더우드는 14명의 한국인 신자들과 함께 최초의 장로교회인 새문안교회를 설립하고 그 날의 예배에서 이미 만주에서 로스선교사를 돕고 있던 서상륜과 백홍준을 장로로 장립하였다.

논의의 여지는 남아있지만 황해도 장연군 소래에는 1884년 6월 29일 한국인 신자에 의해 세워졌던 소래교회가 있었다. 서상륜의 동생 서경조의 봉사를 통해 한국 최초의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시작되었다. 서경조는 장로교 초대 목사 7인 중 한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에 의한 교회보다 1년쯤 앞선 인천내리교회와 의주교회가 설립된 근거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선교사는 프로테스탄트 선교사역의 중심적인 사역자가 되었다. 이들 선교사들은 우선 선교본부를 견고히 하고, 언더우드는 1887년에 아펜젤러는 1888년에 처음 선교여행을 떠났다. 아펜젤러가 떠날 때에는 언더우드는 두 번째 선교여행으로 합류하였다. 두 사람은 복음을 전하면서 두 주간 만에 평양에 이르렀고, 더 북쪽으로 나아가려 했으나, 서울의 정치 상황 때문에 급히 서울로 돌아와야 했다. 천주교에서 명동성당을 왕궁보다 높게 지음으로 정부와 불편한 관계에 놓임으로 프로테스탄트 선교에도 영향을 받게 될까봐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889년 봄 여의사 호톤양과 결혼했던 언더우드는 신혼여행으로 평양를 거쳐 의주까지 두 달 동안 1,600킬로를 여행하였고 놀라운 전도성과를 거두었다.

당시 정부는 선교사들에게 여행을 위하여 특별허가증을 발부해 주었는데 이는 외국 손님들에게 대한 각별한 친절을 베풀도록 중앙정부가 지방에 하달했던 명령서의 일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 활동이 온전히 보장된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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