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문 형무소, 독립을 향한 투쟁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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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 형무소, 독립을 향한 투쟁의 역사
  • 김동근 기자
  • 승인 2012.02.21 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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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순 열사가 옥중 만세운동을 주도한 고난의 터

공주지방법원에서 5년형을 구형받은 유관순은 판결에 불복하여 경성복심법원에서 3년형을 언도받는다. 그리고 1919년 6월 30일 서대문감옥으로 이송된다. 이송된 후 일제의 고된 고문 속에서도 조국의 독립을 갈망하던 유관순은 1920년 3월 1일 3.1운동 1주년을 기해 다시 옥중 만세운동을 주동했다. 이로 인해 유관순은 지하감옥에 수감되어 일제의 모진 고문을 겪는다.

1920년 4월 28일 왕세자 영친왕 이은과 일본 왕실의 마사코(이방자)의 결혼으로 일본은 약 5천 명의 한국 정치범에 대한 사면령를 발표했다. 유관순도 여기에 속해 1920년 9월 30일이면 형기가 만료되어 출감할 수 있었다. 하지만 1920년 9월 28일 오전 8시 20분 출옥을 이틀 남기고 유관순은 서대문감옥에서 순국하고 말았다.

서대문형무소는 1908년 경성감옥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개소하여 여러차례 이름이 바뀌었다. 1987년 서울구치소가 경기도 의왕시로 이전하면서 이듬해 국가사적으로 지정 2007년에는 제1종 전문박물관으로 등록됐고, 국가현충시설로 지정됐다.

자유와 평화를 향한 80년이라는 제목을 가진 전시관 1층은 정보검색실과 형무소역사실 그리고 영상실로 이뤄져있으며, 영상실에서는 80년의 서대문형무소 역사와 그 의미를 영상으로 제작하여 상영하고 있다.
전시관 2층은 민족저항실로 이뤄져 있으며, 일제의 탄압 실상을 전시하고 중앙에는 독립운동가들의 수형기록표를 전시하여 그들을 기억하고 되새기는 추모의 공간으로 만들어 놓았다.

전시관의 지하에는 지하고문실을 복원해 일제의 잔혹함을 알리고 생존 독립운동가의 육성 증언을 통해 형무소에서의 과거를 생생하게 다루고 있다.

1923년 건립된 사형장은 사형을 집행하던 건물로 원형을 그대로 보존해놓았다. 그 옆에 심겨진 나무는 ‘통곡의 미루나무’로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애국지사들이 조국 독립을 이루지 못하고 죽어가는 원통함을 나무를 붙잡고 눈물로 토해내며 통곡했다고 해서 그렇게 이름 지어졌다. 또한 바로 옆에는 시구문이 위치해 있는데 일제가 독립운동가를 사형시킨 후 그 시신에 고문의 흔적이 많아 문제가 생길 경우 그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시신을 몰래 반출하고자 만든 비밀통로다.

그 외에도 옥사 전체를 감시하고 통제하던 중앙사, 실제로 수감자들이 수감되었던 11ㆍ12옥사, 형무소 내에서 수감자들이 노역했던 공장 건물의 원형 공작사, 추모비, 유관순 지하감옥 등 대한민국의 독립을 향한 역사가 담겨있는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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