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절 르포] 열여덟 소녀가 남긴 것은 ‘자유’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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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절 르포] 열여덟 소녀가 남긴 것은 ‘자유’ 였다
  • 김동근 기자
  • 승인 2012.02.20 18: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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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순의 열사 신앙과 애국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이맘때 쯤 우리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한 사람이 있다. 1919년 일제에 맞서 “대한독립 만세”를 외친 유관순이다. 하지만 우리는 유관순 열사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열여덟 어린소녀가 지켜내려 했던 조국은 지금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남아있을지 궁금했다. 나라와 민족의 중요성을 되새기게 하는 3.1절을 앞두고 유관순의 신앙과 애국의 발자취를 따라 나섰다.

유관순 열사를 만나는 여정에 백석대학교 유관순연구소의 2대 소장 김기창 교수와 3대 소장 박충순 교수가 함께했다. 살을 에는 듯 했던 차가운 바람은 일제의 혹독한 탄압을 생각나게 했지만, 하늘은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자유와 평화만큼 청아했다.

▲ 유관순기념교회 매봉교회와 유관순 생가

# 유관순과 매봉교회
천안 매봉로를 지나 저 멀리 매봉교회의 십자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로 옆에 유관순의 생가가 있었다. 유관순이 예수를 믿게 된 배경을 묻자 박충순 교수는 “집 바로 옆이 교회 아니냐”며 “과거에는 사람들이 굳이 예수를 믿지 않더라도 모여서 이야기하고 즐기는 곳이 교회였다”고 말했다.

유관순의 신앙내력은 할아버지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녀의 할아버지 유윤기가 먼저 그리스도를 영접했다. 집안의 어른이 그리스도를 영접하자 유관순의 집안도 여러 가지 모양으로 교회와 함께하기 시작했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에 매봉교회에서만 교인 82명이 참여했습니다.”

과거 병천과 같은 시골 지방에서 한 교회 82명의 성도가 국채보상운동에 동참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이것은 이미 그 마을의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고 있었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교회가 우리 국민들을 하나로 만드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유관순의 신앙에 대한 흔적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며 매봉교회로 발길을 돌렸다. 아우내 만세운동 직후 사람들이 교회에 모여 독립운동을 계획했다고 판단한 일제는 성도들을 탄압하고 결국엔 교회를 불태웠다. 그 후 1967년 유관순의 모교인 이화여고의 후원으로 다시 교회를 건축했고 1998년 기독교대한감리회가 ‘유관순기념교회’라는 이름 아래 교회를 재건축해 지금의 매봉교회가 세워졌다. 또한 전시실을 마련해 유관순의 업적과 그녀가 믿던 그리스도를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매봉교회의 박윤억 담임목사는 전시실의 관리인 역할도 감당하고 있었다. 교회의 전시실에는 유관순이 장명교회에서 아우내 만세운동에 동참하자며 외쳤던 단상이 자리하고 있다. 또한 1967년 이화여고에서 교회를 세워줄 때의 교회 현판과 교회의 종 등이 전시되어 매봉교회의 역사와 유관순의 신앙을 다시금 돌아보게 해주었다.
 
기독교 역사에 대한 교육을 위해 손주들을 데리고 전시실을 방문한 할머니를 만날 수 있었다. 손주들에게 잊혀진 옛 역사를 보여주고 싶었던 할머니는 초라한 전시실의 모습에 아쉬운 속내를 드러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전시실 한 켠에 보관된 유관순의 호적과 재판 기록에 곰팡이가 슬어있었다. 곰팡이가 슬어있는 전시물들을 바라보며 “우리의 신앙과 애국심에도 곰팡이가 피지는 않았을까?” 하는 질문을 던져봤다.

박 목사는 “애국열사를 기념하는 전시실이지만 교회가 운영한다는 이유로 정부의 지원을 받을 수 없다”며 더 좋은 시설에 보존하지 못하는 것이 후손으로 안타깝다“고 말했다.

# 횃불로 승화된 봉화탑

▲ 봉화에 대해 설명중인 유관순연구소 3대소장 박충순 교수(왼쪽)와 2대소장 김기창 교수(오른쪽)
“1919년 3월 31일 유관순은 매봉에 올랐다. 그리고 불을 지폈다. 매봉 주위 24개의 산 정상에서 함께 연기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유관순 생가에서 머지않은 곳에 ‘유관순열사기념관’이 있다. 먼저 유관순이 봉화를 올렸던 봉화탑에 올랐다. 3천여 명이 만세를 외쳤던 병천면(아우내)이 한 눈에 들어왔다.

매년 2월 말 유관순의 봉화 거사를 기념하기 위해 천안시동남구문화원(원장:김준기)이 주관하는 ‘아우내봉화축제’가 바로 이곳 병천에서 열린다. 올해도 오는 29일 ‘3.1운동 제93주년기념 아우내봉화축제’가 유관순열사기념관에서 개최될 예정이다.

김준기 원장은 “유관순은 어려움에 처했을 때 기피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그 어려움을 극복하려 했고 그것은 민족정기에서 나온 것”이라며 “봉화축제는 유관순의 정신을 횃불로 승화시키는 것”이라고 말했다.

# 유관순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만세운동
“1919년 4월 1일 아우내장터에서는 3천여 명의 군중들과 장사꾼이 모여 숨을 죽이고 있었다. 유관순이 독립선언서 공약 3장을 선창하면서 만세운동은 시작되었다.”

만세운동의 흔적을 찾아 아우내 장터를 찾았다. 한 켠에 마련된 ‘아우내독립만세기념공원’에서 박 교수는 “매봉교회가 중심이 되어 주변 유림세력들이 모인 만세운동”이라며 “단일 교회가 중심이 되어 3천여 명의 사람을 동원한 만세운동은 전국에 하나밖에 없을 것”이라며 아우내만세운동이 가진 특별함을 전했다.
또한 “아우내만세운동은 유관순 열사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며 세 가지 이유를 들었다.

그 첫 번째 이유는 전국에서 일어난 만세운동 탓에 골머리를 앓고 있던 일제는 전보다 감시를 강화했다. 아우내만세운동까지 20여 일 남짓 남은 상황 유관순은 젊을 여성인 탓에 그 감시망을 피해 교회와 마을을 돌며 만세운동에 참여할 것을 독려했다.

둘째, 유관순은 신교육을 받은 신여성이었다. 실제로 당시 이화학당은 학생들에게 시국 강연이나 토론을 여러 차례 훈련시켰다. 이러한 훈련을 받은 유관순은 20여 일 동안 각지를 돌아다니며 고집 센 시골 유지들을 설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셋째, 당시 지방에서는 태극기를 제대로 그릴 줄 아는 사람이 없었다. 1883년 고종이 태극기를 국기로 제정 공포하였으나 국기 제작방법을 제대로 명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관순은 이화학당 생활을 통해 태극기 그리는 방법을 배웠고, 만세운동에 필요한 태극기를 유일하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야말로 유관순이 아니었다면 할 수 없는 일들이었다.

# 유관순 열사의 빈 무덤
봉화탑에 내려오는 길에는 ‘유관순열사초혼묘’가 자리하고 있었다. 박 교수는 유 열사에 대한 슬픈 사연을 꺼내놓았다.

“1920년 9월 28일 유관순은 일제의 폭행과 고문 끝에 옥중에서 순국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부모님은 4월 1일 아우내만세운동에서 돌아가셨고, 오빠 유우석은 일제의 탄압에 견디다 못해 양양으로 거주지를 옮기면서 유관순의 시신을 찾아갈 사람이 없었습니다. 때문에 시신의 수습이 늦어지고, 결국 이화학당의 주관으로 정동교회에서 장례가 치러졌고 이태원공동묘지에 안장했지만 공동묘지가 이전되면서 유관순의 유골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습니다.”

일생을 조국의 독립에 바쳤던 유관순에게 죽어서도 자유는 허락되지 않았다. 천안시는 유관순의 영혼을 위로하고자 1989년 10월 초혼묘를 봉안했다.

# 유관순의 무엇에 주목하는가?

▲ 봉화탑에서 내려다본 아우내장터
김기창 교수는 유관순의 리더십에 주목한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기독교가 있다고 말한다. “어렸을 적 매봉교회와 이화학당, 정동교회에서의 신앙생활은 유 열사의 자기 확신과 삶의 핵심을 구축하기 위한 진지한 고민과 노력, 사랑, 용기, 결단과 설득력 등을 만들어냈고 이 모든것에 신앙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에 착안한 백석대학교 유관순연구소는 천안시의 지원으로 천안시 여성 지도자들을 대상으로 리더십 강좌를 열어 큰 호응을 얻은 바 있고, 2012년 1학기부터 백석대학교의 교양과목으로 ‘유관순과 참 리더십’이라는 강좌를 개설한다. 또한 초ㆍ중ㆍ고 교사를 대상으로 하는 리더십 직무 연수도 시작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유관순의 리더십에 대해 고찰한 연구원 나달숙 교수(백석대 법정학부)는 “유관순연구소에 근무하는 동안 시간이 흐를수록 유관순 열사의 투혼과 애국정신에 감동과 존경심이 깊어진다”며 “이 시대는 유관순 열사와 같은 강한 애국심을 본받아 자기가 처한 위치에서 정의를 추구하고 이타적인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절실하게 필요한 때”라고 말했다.

# 피흘려 지켜낸 조국의 의미
유관순의 발자취를 따라가면서 이런 질문을 던져 보았다.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자유와 풍요에 감사한 적이 있는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선현들이 피 흘리며 지켜낸 자유를 너무나 당연하게 누리고 있다. 그 자유를 위해 고난과 핍박도 마다하지 않은 그들은 기억조차 하지 못한 채….

유관순 열사는 그리스도를 닮았다. 자신의 몸을 희생하여 인류를 구한 그리스도 그리고 가냘픈 여인의 몸으로 조국을 지켜낸 유관순. 자유가 없다면 우리에게 신앙도 없었을 것이다.

3.1절을 맞아 우리의 자유를 위해 몸을 바쳐 희생한 많은 애국지사를 생각하며 참된 자유와 민족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됐다. 하나의 작은 불꽃이 들불처럼 번져간 3.1만세운동의 역사가 더욱 소중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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