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가 무너지면 교회도 세상과의 관계에서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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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가 무너지면 교회도 세상과의 관계에서 실패”
  • 표성중 기자
  • 승인 2012.01.11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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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목협 제21차 열린대화마당 … 기독교 윤리학자들이 바라본 물질ㆍ성(性)ㆍ교권

독일의 신학자이며 윤리학자였던 디트리히 본 회퍼는 하나님께서 교회에 노동, 가정(혼인), 정부, 교회라는 네 개의 영역에 대한 고유한 소명을 위임했다고 주장했다. 이 가운데 노동은 돈과 관련된 위임이며, 가정은 성(性)과 관련된 위임, 정부는 권력과 관련된 위임이다. 사실 돈과 성, 권력은 인간사회의 모든 영역을 다 포괄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교회는 이 세 가지 영역과 관련된 세상의 모든 일에 관여해야 한다. 그리고 세상에 관계하는 정신과 방식에 있어서 반드시 세상과는 구별된 특징을 갖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한국 교회는 이 세 가지 위임의 영역에서 윤리적으로 무너지고 있는 심각한 상황에 처해 있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한국 사회에 많은 영향력을 미치는 한국 교회는 현재 거센 도전과 개혁을 요구받고 있으며, 그 중심에 목회자의 윤리문제가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피할 수 없다. 총신대 기독교윤리학 이상원 교수는 “하나님이 주신 소명을 바르게 수행하도록 지도해야 할 목회자들이 돈과 성, 권력의 영역에서 무너지는 것은 목회자가 세상과의 모든 관계에서 실패하고 있다는 것이며, 이는 곧 목회자의 지도를 받는 교회가 세상과의 모든 관계에서 실패하고 있다는 뜻”이라고 우려의 목소리를 전했다. 사실 목회자가 돈, 성, 권력을 멀리해야 하는 자리라는 사실은 이미 삼척동자도 다 아는 명제가 되어 있지만 현재 한국 교회 목회자들은 이 영역에서 심각하게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문제로부터 탈피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대표회장:전병금 목사)가 지난 9일 ‘목회자여, 영적 성찰을 통해 교회의 영광을 회복하라’는 주제로 열린대화마당을 개최했다. 이날 기독교 윤리학자 및 목회상담학자가 발제자로 나서 물질, 성, 교권 등에 빠진 목회자들의 윤리적 타락상의 원인을 진단하고, 자기갱신의 노력을 촉구했다. 그들의 주장을 통해 한국 교회 목회자의 윤리적 갱신 및 자기관리의 방향성을 모색해 본다. <편집자 주>

물질 … 더 많은 소유를 꿈꾸기보다 자신을 비워 가진 것을 나누는 삶의 방식 추구 필요
성(性) … 목회자 성적 타락은 십계명 범하는 중대한 죄,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어
교권 … 교회와 목회자는 하향화 추구하며, 나눔과 섬김으로 사회적 책임 실현해 나가야


▲ 유경동 교수(감신대·기독교윤리)
# 맘모니즘, 내적회개에서 사회적 성화로
이 시대 교회와 목회자가 사회로부터 비판받는 이유는 전적으로 물질에 자리를 내준 ‘존재의 신비를 잃은 결과’라고 단정내리고 싶다. ‘물질’이란 인격을 매개로 하는 하나님의 도구임에도 불구하고 이제 인간이 오히려 경제 현상의 도구로 전락해 버렸다. 사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돈의 역할은 대단히 중요하다. 문제는 정치, 경제, 문화, 심지어 기독교계 일각에서도 돈은 그 화폐가치로 사람의 생각과 마음을 움직임으로써 많은 경우 사람을 허망하고, 부패하게 만들어 개인과 공동체를 파국으로 몰아간다.

반대로 드문 일이지만 개인의 생명과 공동체를 살리는데 사용되기도 한다. 돈의 이러한 힘은 돈의 가치가 유발하는 묘한 심리적인 특성 때문이다. 돈이 결코 인격을 가진 주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마치 폭군처럼 그 위세를 떠는 주된 이유는 인간 사이의 인격적인 관계가 화폐가치의 크기 여하에 의하여 좌지우지되는 비인격적 관계로 전락해 버리기 때문이다.

존재를 위협하는 우리 시대의 자본주의는 마르크스적 비판에 의하면 ‘물신’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에도 돈은 하나의 권세를 가진 주체로써 나타난다. 물신은 상품의 인격화이고 사람의 사물화 또는 상품화로써 자본주의 생산과정에서 이 물신은 각각 상품, 돈, 그리고 자본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특히 상품과 돈이 물신으로 바뀌어져 나가면서 더욱 큰 물신이 등장하게 되는데 그것이 곧 자본이다.

한국 사회는 더 많은 돈을 소유함으로써 자신의 존재가치가 더 의미 있게 된다고 자칫 착각에 빠지는 우리들에게 ‘로또의 대박’이라는 환상을 심어줬다. 이것은 곧 ‘대박만 터지면 인생은 역전’이라는 맘모니즘으로 볼 수 있다. 물론 로또에 긍정적인 측면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니다. 전체 수익금의 일부가 사회 간접자본으로 들어가 재투자되기 때문에 복권을 사는 행위로 사회발전에 공헌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로또는 그 자체가 갖고 있는 비인격적 특성 때문에, 아무리 로또의 정당론을 펼친다고 해도 당위성을 갖기 힘든 한계가 있다.

가장 심각한 로또 폐해는 소유에 대한 맘모니즘적 미신이다. 즉 로또는 인간에게 소유에 대한 무한한 욕구를 유발시킨다는 것이다. 소유에 대한 집착은 동시에 소유만을 바라는 자신과 이웃을 공동체에서 소외시키게 된다. 왜냐하면 자신이 원하는 만큼의 소유도 가능하지 않으며, 소유만을 바라는 이기적 특성상 타자를 고려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신앙의 세계에서 인간은 피조성의 한계를 조물주 하나님 자신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인정함으로써 극복한다. 여기에서 극복하는 방식은 신이 되려는 저 닿지 못할 하늘을 향해 허망한 바벨탑을 쌓는 맹신을 포기하고, 철저하게 자신을 드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돼 이 땅 위에서 신앙으로 사는 것이다.
그러나 로또는 인간의 소유한계를 망각하게 함으로써 즉, 제한된 인간의 소유로 무한한 돈을 가질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줘 인간으로 하여금 땅에서 땀을 흘려 열심히 살 생각을 잊게 하고, 일주일간 인간의 영혼을 지배하는 공중권세를 가진 자에게 굴복하기를 원한다. 로또가 맘몬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축복은 확률이 아니며 더군다나 기우도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생의 축복을 나누어주시기 위해 창세전부터 십자가 위의 고통을 준비하셨다. 축복은 고통과 함께 그 의미를 더욱 더 분명하게 드러낸다. 이제 그 고통은 이 땅 위에서 신앙인이 함께 나누고 분담해야 할 신앙의 몫으로 우리에게 남겨져 있다.

국가 경제의 위기 속에 물질로 고통당하는 이들이 많은 이 때, 기독교인은 더 많은 소유를 꿈꾸기보다 자신의 마음을 비워 가진 것을 나누는 삶의 방식을 통해 함께 존재하는 축복된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역사 속에서 교회가 경제문제가 직면해 물신과 대항했을 때 극복한 적은 거의 없다. 리처드 니버는 이를 ‘교회분열의 사회적 배경’에서 심각하게 지적하고 있다. 교회가 물질문제와 직면해 위기에 처할 때 영적 혁명으로 나아가기보다는 대개 ‘내적 회개’로 회피하게 된다고 날카롭게 꼬집었다.

사회를 병들게 하는 물신에 대항하기 보다는 내적 회개의 문제로 회피하는 전형적인 교회의 메시지는 따라서 대개 내면치유나 자아회복과 같은 주제에 집중하게 된다. 그리고 물질주의의 절대적 욕망을 잘못하면 하나님의 축복과 혼동하는 실수를 범하게 되는 것이며 값싼 은총의 문제를 야기하게 되는 것이다.

교회의 갱신은 물론 내적혁명으로부터 시작된다. 이 혁명은 진정한 회개를 말하며,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는 구속사의 원점에서 출발하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 당신의 영광을 온전히 돌려드리며 하나님만이 우리의 구원을 책임져 주실 분임을 고백할 때 우리는 이 땅의 헛된 것에서 눈을 돌려 하나님만 바라보게 될 것이다.

죄의 용서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총을 토해 우리의 죄가 덮어지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변화되어 거룩한 삶을 사는 우리의 ‘사회적 성화’와 연관이 되어 있다. 우리는 용서받은 죄인이지 의로운 죄인은 아니다. 따라서 기독교인의 진정한 회개는 자기 성찰과 반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변화된 삶의 모습을 통해 사회를 정화하는 행동과 연관이 되어야 하며, 이 때 한국 사회를 변화시켜 나갈 진정한 영적 에너지가 갖춰지게 될 것이다.

▲ 홍인종 교수(장신대· 목회상담)
# 성교육으로 ‘성윤리’경각심 고취 필요
목회자의 성적 타락은 정당화될 수 없으며, 그 책임은 목회자인 당사자의 몫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조금만 정직하다면 타락은 스스로 선택했기 때문이고 그 누구도 성적인 것을 강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적 타락은 하나님 앞에서 범죄한 것이다. 성적인 범죄는 대개 다른 죄들을 동반한다. 간음한 사람은 최소한 십계명 중 다섯 가지 이상을 범하게 된다. 그는 하나님보다 자신의 욕망을 더 우위에 두고, 도적질하고, 탐하고, 거짓 증거하고, 간음하지 말라는 분명한 계명을 깨뜨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잘못된 성적 타락에 대해 “돌아서라”고 말씀한다. 따라서 영적인 회개가 먼저 있어야 한다. 또한 적절한 영적 멘토의 도움을 받아 일정 기간 회복의 기간을 가져야 한다. 진정한 화개는 하나님과의 화해 뿐 아니라 자신과의 화해, 피해자와의 화해, 가족, 공동체, 이웃과의 화해를 포함하는 긴 과정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목회자는 자신의 결혼 생활에 우선순위를 두고 가정에 열정이 식지 않게 해야 한다. 추문 거리를 만들지 않기 위해 스스로 적절한 울타리를 만들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영적 상태를 정직하게 점검해야 한다. 목회자의 사역은 다른 사람들을 돌보고 상담하고, 대화하는 일이 중요하기 때문에 자신의 인격적 한계를 넘어 과도하게 관여하거나 능력의 부족으로 죄의식을 갖게 되면서 감정적 결합의 상호작용이 성적 친밀감으로 발전할 수 있다.

즉, 목회자와 성도가 서로의 연약함을 나누다보면 정서적, 성적으로 쉽게 가까워질 수 있다. 또한 신뢰를 전제로 한 관계이기 때문에 유혹과 위험을 무시할 수 있다. 게다가 목회자와 성도의 힘의 불균형 때문에 호의나 배려를 성적 매력이나 관심으로 착각하거나 오해할 수 있다. 목회자의 가족생활 주기와 목회성공지향적인 과도한 사역 활동이 부부관계를 소원케 함으로 친밀감에 대한 욕구가 이성과의 성적 타락으로 진행될 수도 있다.

목회자의 성적 타락은 어렸을 때의 상처나 낮은 자존감 등 인격 장애, 일 중독, 부부갈등, 목회자에 대한 과도한 요구와 성공지향적 목회 환경, 사탄의 유혹과 유혹하는 이성 등에서 다양한 원인을 설명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목회자의 선택이며 따라서 전적으로 목회자의 책임일 수밖에 없다.

특히 목회자가 성적으로 타락했을 경우 목회로 돌아갈 수 있느냐의 회복에 관한 많은 논쟁이 있다. 왜냐하면 성적 실패의 결과가 너무나 파괴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형제들 중에 잘못된 자를 바로 잡아야 하고, 성적으로 타락해서 나실인의 서약을 깨고 수치를 당하는 삼손에게 두 번째 기회를 주셨던 하나님이시기에 성적으로 넘어진 목회자에 대한 목회 회복의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한다.

그러나 타락한 목회자가 설령 회개와 하나님의 용서, 그리고 재헌신 등을 통해서 목회로 복귀해도 이전의 남편, 아버지, 목회자로서의 리더십에 큰 손상을 입었기 때문에 그의 사역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문제는 어떤 절차와 단계가 필요한가이다.

첫째, 복귀 이전에 진정성이 있는 회개와 목회 현장에서 떠나는 유예기간이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유예기간은 사안에 따라 달라야 한다. 예를 들어 부적절한 관계의 기간, 일회성 또는 반복성 여부, 그리고 성적 타락의 치명성 등에 따라 심리치료나 정신과 치료, 증상에 따른 약물 치료 등을 병행할 수도 있다. 하나님 앞에서의 회개 뿐 아니라 자신을 전인적으로 도와줄 수 있는 신뢰할 만한 영적 지도자나 전문 상담자와 회개와 회복의 시간을 함께해야 한다.

둘째, 회개는 당사자들에 대한 용서구함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시간이 필요하고, 그의 회복을 도울 수 있는 의지할만한 그룹이 있다면 큰 도움을 얻을 수 있다. 왜냐하면 목회자의 타락은 주로 목회자의 교만이나 자기 과신이 동역자 그룹으로부터 이탈하면서 발생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셋째, 회복에 가장 중요한 단계는 교회로부터의 회복과 사역지에서의 재청빙이다. 일정한 유예기간을 거쳐서 철저한 회개, 상담과 영적 지도, 부부관계의 회복 등이 있다고 해도, 교회가 그를 사역자로 청빙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러한 목회 복귀가 성경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행되어야 할 것은 목회로의 복귀를 논하기 전에 교단에서 성문제를 일으킨 목회자에 대한 처리법을 먼저 제정하고, 회복 절차나 단계에 관한 지침을 만드는 것이다. 또한 사회 기관이나 기업, 학교 등에서 매년 의무적으로 실시하고 있는 직장 내 성희롱 교육을 노회나 총회 차원에서 정규적으로 실시해 성과 연관된 문제를 예방하고 목회자의 성윤리에 관한 경각심을 고취시켜야 한다.

▲ 강병오 교수(서울신대·기독교윤리)
# ‘타자 위한 생명공동체’ 추구해야
목회자와 교회에서 발생하는 여러 윤리문제 중에서 종교권력 내지 교회권력이라 칭할 수 있는 ‘교권’의 문제는 심각하다. 여러 형태의 교권 문제 발생으로 인해 오늘날 개신교가 ‘힘 숭배’ 종교가 아닐까 할 정도로 우려를 낳고, 사회로부터 혹독한 비난과 비판을 받고 있다.

개신교는 권력으로부터 결단코 비켜나갈 수 없다. 정치, 사회, 경제 등 사회 모든 영역에서 힘이 작용하고 있듯이 개신교 역시 힘의 기제가 부정적이고 세속적으로 작동되고 있다. ‘권력의 자기성’이란 측면에서 볼 때 종교집단, 특히 제도로써 교회는 권력이 가지는 자기중심성의 성격을 배제하기 어렵다. 제도적으로 집단화된 교회의 자기중심성은 불가피하다. 제도교회가 수량적, 경제적, 정치적 힘을 가지면 가질수록 집단적 자기중심성은 증폭되고, 영적 힘보다는 그러한 물리적 힘에 의존하려는 양상을 점차 띠게 된다.

만약 교회들이 교인 수가 몇 천에서 몇 만 명을 헤아리게 되고, 수십 억 내지 수백 억의 재산을 가질 뿐만 아니라 교회 내에서 공동체를 조직하고 지배하는 절대 권력을 가지게 되면 권력의 자기중심성은 강화된다. 그런 교회를 담임하는 목회자는 교회 자체를 자신의 사적 소유물로 간주하기도 한다. 이렇게 교회는 내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강력한 권력을 갖게 된다.

권력이 가지는 강제성 측면에서 볼 때, 집단으로써 교회는 자체가 갖는 강제력 때문에 파괴적 힘을 발현할 수 있다. 이럴 때 교회 자정 노력이나 순수한 사랑이라는 도덕적 호소 내지 합리적 설득으로는 비정상적으로 확장되는 이기적이고 강제적인 힘을 제어하거나 견제하기란 매우 힘들다.

다른 견제 집단의 감시와 비판이 필요할 뿐 아니라 때에 따라서는 제도 개선이나 정책 마련이라는 다른 강제력에 의한 방법을 취해서 권력 제어나 견제의 실효성을 거둘 수 있다. 이를 위해 한국 교회는 교권문제를 해결할 목회윤리적 과제를 도출할 필요가 있다. 목회자는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자기 정체성을 확립해야 한다. 오늘날 목회 현장에서 생겨나는 제반 윤리적 문제는 목회자가 자신이 누구인지 잘 모르고 사역에 임하기 때문에 자주 발생한다. 그러므로 목회윤리에서 최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선결 과제는 목회자의 존재와 그 자격에 대한 자기이해이다.

특히 목회자에게 주어진 권한은 자신의 것이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거룩한 명예다. 목회자의 자기 정체성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부르심을 받았고, 그를 따라 사는 존재라는 분명한 자각에서 온다. 한 마디로 타자를 위한 존재로 살았던 예수 그리스도처럼 목회자 또한 자기를 위해 사는 존재가 아닌 타자를 위해 살아야 하는 것이다.

힘을 가지면 가질수록 교회를 수단으로 자기를 위해, 자기 왕국을 쌓고 사는 것이 아니라 그 힘을 타자를 위해 선용하고 아낌없이 베풀며 사는 자가 목회자이다. 교회만이 아니라 세상을 섬기며 타자로서 사회적 약자를 위해 고난 받고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존재가 바로 목회자다.

목회자와 마찬가지로 교회도 자기중심성을 고수하는 이기적 공동체가 되기보다 타자를 위한 교회가 되어야 한다. 교회가 아무리 제도화되어 권력체가 될지라도 ‘타자를 위한 생명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힘을 섬김으로, 나눔으로 바꾸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교회가 지속적으로 자아가 아닌 타자를 지향하는 공동체로 나아갈 때, 비로소 교회의 본질을 세워갈 수 있고, 그리스도의 몸을 바로 지켜나갈 수 있다.

또한 목회자와 교회는 하향화를 추구해야 한다. 종교는 자칫 지배계급의 권력을 정당화하고, 기존질서를 옹호하는 식으로 이용되어 사회변동을 억제하는 권력계층으로 전락할 수 있다. 한국 사회에서 개신교도 그처럼 지배계급이 추구하는 사회변동 억제 전략에 말려들 수 있다. 특히 성직자 계층은 현존하는 사회, 경제, 사법, 교육, 문화 질서를 수호하는 지배계층의 억제 전략을 하나님의 섭리로 움직이는 질서라는 종교적 담론으로 무비판적으로 생산해 낼 수 있다.

한국 교회가 피지배계급을 억압하는 지배계급의 질서에 수긍하기보다는 피지배계급의 이익과 소외계층의 편에 서서 나갈 때 한국 교회의 미래는 보장될 것이다. 개신교 계층은 지배계급 질서에 안전하게 편입하려고 하기보다 타자, 즉 사회적 약자인 소외계층 편에서 낮은 곳을 향해 나가고, 섬기고 나누는 계층으로 서야 한다.

현대사회에서 종교권력은 여타 세속권력처럼 권력의 자기 속성상 자기 자신을 무한 증식해간다. 개신교 역시 교회권력에서 피해갈 수는 없다. 오늘날 끊임없이 표출되고 있는 많은 개신교 교권문제는 권력의 비윤리화로 인한 역기능의 측면을 보여주고 있다. 기독교 윤리적 내지 목회윤리적인 성찰과 반성, 그 극복을 위한 각고의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교회 혹은 교회 관련 기관이나 단체의 비윤리적 권력화 문제를 제어하거나 감시하는 활동을 강화해야 한다. 갖고 있는 힘을 나눔과 섬김의 논리로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한 사랑과 정의와 평화를 실천해 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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