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국가 독일 세운 디아코니아, ‘3중 책임’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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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국가 독일 세운 디아코니아, ‘3중 책임’강조
  • 이현주 기자
  • 승인 2011.11.07 11: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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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의 발상지 독일에서 ‘디아코니아’의 길을 찾다 <하>

바델 뷔르템베르크 주에 위치한 구스타프 베르너재단. 이곳은 노인과 어린이, 중독자와 장애인을 위한 복합 시설이 3만 여평의 땅에 갖춰져 있다. 주 안에총 30개의 시설이 있고, 모두 수혜자의 자립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한국 교회를 하나로 모으는 방법은 이제 ‘섬김’이 유일하다. 한국교회봉사단은 11개 교단 및 3개 연합봉사단체를 모아 ‘한국교회사회봉사공동기획단’을 조직하고 독일과 프랑스 지역 ‘디아코니아’ 현장을 탐방하고 돌아왔다. 연합과 자립, 그리고 조건 없는 섬김으로 상징되는 유럽교회의 디아코니아는 한국 교회에 많은 과제를 던져주었다. 그리고 ‘디아코니아’는 종교개혁의 본질이라는 사실을 거듭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베르너·비헤른 등 조건 없는 섬김과 ‘수혜자 자립’ 초점
한국 교회 종교개혁 소명 안고‘섬김과 봉사’통한 연합 다짐

바델 뷔르템베르크 주에 위치한 구스타프 베르너 재단은 200년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베르너 재단을 통해 도움을 받는 사람만 1만 명이 넘는다. 19세기 독일에서도 베르너 재단은 파격적인 곳으로 여겨졌다. 30개 시설이 주 전체에 흩어져 있고, 3만 평 규모의 땅에 12개의 시설이 공동체를 꾸리고 있었다.

# 종합 복지의 결정체 베르너 재단
베르너 전도사가 사역을 시작한 19세기는 전후 폐허가 된 시기였다. 부모를 잃은 고아들이 거리를 전전했고, 사람들은 일자리를 찾지 못해 생계에 어려움을 겪었다.

베르너 전도사는 고아들을 돕는 사역부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공장을 세웠다. 여성들에게는 교육을 시켰고, 직업훈련을 실시했다. 모든 것은 파격이었다. 베르너 재단 소개책자에는 성인 남성과 노인, 지체부자유자, 어린이 등 4명의 사진이 있다. 4명은 베르너 재단의 4가지 사역을 상징한다.

부모를 잃거나 방임된 아이들과 장애인, 중독자와 노인 등 큰 틀에서 4가지 사역이 진행되고 있으며, 그들이 삶의 목적을 세우고 꿈을 가질 수 있도록 전적인 헌신을 하고 있다.

안내자 발터 헤르만 씨는 이 곳에서 가장  중점을 두는 부분은 ‘자립’이라고 말했다. 수혜자들이 교육과 돌봄의 혜택을 받는데 그치지 않고, 자신에게 맞는 일자리를 찾아 사회 구성원으로서 살아가게 한다는 것이다. 

베르너재단의 장애인 창재작업실.
장애인들을 위한 작업장은 농업과 창재작업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이 곳에서 생활하는 장애인들은 자신의 창작물을 팔거나 농업을 통해 사회에 기여함으로써 연금혜택까지 받을 수 있다고 했다.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삶, 누군가의 도움만으로 버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일하고 번 돈으로 살아가는 ‘자립’원칙이 적용된 것이다.

농장 안에는 유기농 매장이 있고, 유기농 생산품을 통해 다양한 수익을 올리는 구조가 인상적이었다.

물론 이와 같은 시설이 인정받기까지 베르너 목사도 숱한 어려움을 겪었다. 교회를 떠나 구제에만 힘쓴 베르너 목사에 대해 독일 교회의 시선은 곱지 않았던 것이다. 19세기 당시 독일 교회는 그를 배척했다. 하지만  21세기에 들어선 지금, 그는 교회가 자랑하는 인물이자, 바델 뷔르템베르크 주가 내세우는 역사적 인물 중 한 명으로 꼽힌다. 베르너 재단은 ‘마이바흐’ 같은 자동차 왕을 배출하기도 했고, 그의 선진적이며 선구적인 사역은 독일 사회복지에 있어 중요한 모델이 되기도 했다.

베르너 재단을 둘러본 사회복지 참관단은 로텐부르그로 이동해 각 교단의 현황을 소개하는 좌담회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대전 기독교연합봉사회 한상업 사무총장은 안타까운 한국 교회의 현실을 토로했다.
과거 연합봉사회는 농민학원을 운영했고, 새마을운동에 영향을 준 단체였다. 신협과 고아원, 의수족 제작사업, 양곡은행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사회에 기여했다. 당시 사회적으로 상당한 지지를 받은 사역이었지만 15년 전 해외 교회의 원조가 끊어지면서 농민학원 등 활동이 중단됐다. 사회복지법인으로 전환돼 명맥을 이어올 뿐, 초기 교회의 이름으로 전개한 수혜자 중심의 다양한 사역은 접어야 했다.

한 총장은 “좋은 하드웨어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지속하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며 “베르너 재단은 꼭 과거 농민학원의 모습이었다”고 회상했다. 대전 연합봉사회도 수혜자의 자립을 돕는 사회적 기업으로 성장 가능성이 있었지만 ‘주는 것’에 그쳤고, 기독교 기관 혹은 사회복지 시설이 수익을 내는 것에 대한 사회적 선입견을 넘어서지 못했다.

# 종교개혁 발원지 ‘비텐베르크’

독일방문 9일째, 일행들에게 설레는 만남이 기다리고 있었다. 종교개혁의 발원지 ‘비텐베르크’에 도착한 것이다.

95개조 반박문이 나붙은 비텐베르크 성 교회 철문에는 반박문이 그대로 새겨져 있었고, 교회 안에는 개혁자들의 조각과 다양한 그림들을 볼 수 있었다.

95개조 반박문이 나붙었던 비텐베르크성교회.
루터는 과연 어떤 개혁자였을까. 많은 이들이 디아코니아의 개념은 부처와 칼빈에게서 더 많이 찾아낼 수 있다고 하지만 독일에서 이뤄진 루터의 디아코니아적 사명과 역할은 지대하다고 할 수 있다. 루터의 디아코니아 의식은 그의 3개 신분론 중 ‘경제 신분’에서 확인할 수 있다.

루터가 규정한 ‘경제 신분’은 “인간에게 주어진 능력, 재산, 노동의 수확물은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으로 황금률의 의미에서 이 모든 것은 이웃을 섬기는데 이용되어져야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루터는 “이웃을 섬기는데 사용되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은 불의하게 소유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루터의 복지원칙은 16세기에 ‘빈자보호법’이라는 결실을 만들어 냈고, 독일을 넘어 유럽 전체에 확산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루터의 실질적 노력은 ‘공동금고’에서 잘 나타난다. 루터는 1523년 라이스니히에서 공동기금을 도입했다. 이것은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개신교의 첫번째 세금이었다. 공동금고는 3개의 열쇠가 모여야 함께 열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루터는 교회와 시당국, 시민대표가 이 일을 함께 하도록 했다. 금고의 수익으로 목사의 월급과 교회건물 관리비를 충당했으며, 가난하고 병든 자를 위한 복지에 사용했다. 이 금고를 통해 장애인들에게 저금리 대출을 해주었고, 가난한 가정의 자녀들이 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도왔다.

예장 통합 사회봉사부 이승렬 총무는 “루터의 디아코니아는 3중적 책임을 논하고 있다”며 “크리스천 개인의 삶과 교회, 그리고 사회적 책임을 강조했다”고 설명했다.

이 목사는 “종교개혁 당시 루터는 구걸을 금하게 하고 대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금고를 만들어 전체 교회가 이 일을 시행하도록 했다”며 “이 사상이 전 유럽에 퍼져나갔던 역사를 확인할 수 있다”고 말했다.

결국 루터는 “올바른 신앙이 있는 사람은 행위가 따르며 신앙이 큰 사람은 행위도 크다”는 말로 기독교인의 사회적 책임과 디아코니아 사명을 강조했다.

루터의 종교개혁사를 좀더 자세히 보기 위해 일행들은 ‘루터하우스’를 찾았다. 1508년 루터가 비텐베르크에 도착한 이후 수도사로서 그리고 1525년부터는 가정을 꾸려 살았던 역사적 공간이 바로 ‘루터하우스’다. 박물관 곳곳에는 루터의 흔적이 남아 있었고, 종교개혁의 긴박한 역사가 새겨져 있었다.

빈자를 위해 만든 루터의 공동금고.
교황 레오 10세가 내린 루터의 파문 칙서와 멜랑히톤과 함께 작업한 신약성서, 빈자를 위해 만들었던 공동금고와 개신교 최초의 찬송가집도 만날 수 있었다.

인상적인 것은 루터가 독일 시의원에게 보낸 서한으로 “독일의 모든 시의원들에게 기독교 학교를 세우고 유지하기를 고하노니”라는 문구가 담겨 있다. 루터의 이 글은 독일 초등학교 보편화를 이뤄낸 역사적 밑거름이 됐다고 한다.

루터는 성서를 이해하기 위해 읽고 쓸 수 있어야 하며,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신앙을 스스로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여성도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당시 독일 농촌에는 국민의 80%가 거주했지만 학교가 거의 없었다고 한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성서’를 모든 이들에게 전함으로 문맹을 깨치고, 독일어를 보급하는데 상당한 기여를 했다. 종교개혁이 독일의 사회개혁을 이뤄낸 것이다. 루터하우스에서는 그가 남긴 가장 큰 유산 ‘독일어 성서’도 볼 수 있었다.

# 정부 정책 바꾸는 ‘로비아르바이트’
루터의 종교개혁이 독일 및 유럽의 사회복지 근간을 마련했음에는 이의가 없다. 하지만 산업혁명과 세계2차대전을 거치면서 황폐해진 독일에 ‘디아코니아’의 사명을 불어넣은 인물이 또 한 사람 있다. ‘요한 힌리히 비헤른’. 독일의 디아코니아를 말할 때 가장 먼저 거론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산업혁명 여파로 심각한 사회문제를 맞이하게 된 독일은 대규모 각성운동과 함께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실천이 광범위하게 일어났다. 그리고 그 책임이 더욱 강조된 것은 1848년 비텐베르크 성 교회에서 열린 제1회 독일교회의 날 행사였다.

이 날 즉흥 연설에 나선 비헤른 목사는 “오늘날 교회에는 한 가지 중요한 결함이 있다. 그것은 교회 전체가 ‘사회선교’는 나의 일이며 교회의 과제라고 인정하지 못하고, 사랑의 실천과 신앙이 같은 것이라는 인식을 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비헤른은 이어 “그리스도가 살아있는 하나님의 백성 속에서 전적으로 자신을 드러냈듯이 하나님의 행위를 통해 우리도 선교해야 하며, 가장 고귀하고 순수하며 교회적인 것은 ‘사랑’”이라고 강조했다.

그의 연설은 1848년 ‘사회선교 중앙위원회’를 조직하는데 영향을 주었고, 이 위원회가 1975년 창립된 기독교 사회봉사으로 이어진다. 독일교회총연합(EKD) 산하에 있는 개신교 사회봉사국은 베를린에 위치해 있다. 독일 교회는 교회법 안에 “디아코니아는 교회의 본질이자 삶의 표현”이라는 조항을 명문화할만큼 디아코니아에 대한 책임감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2차 세계대전 후 세계교회로부터 받은 사랑을 되갚기 위해 ‘세상을 위한 빵’을 조직하고 재난구호와 제3세계 지원에 나서고 있다.

산하에 3만여 개의 디아코니아 시설과 45만 명의 동역자를 둔 EKD는 주 교회 사회봉사국과 요양소, 병원, 어린이 보호 등 전문분야의 디아코니아를 총괄하고 있다.

베를린 기독교사회봉사국. 한국 방문단을 맞이한 이 곳에서는 디아코니아 사역 중 정부 정책과 입법에 관여하는 '로비아르바이트'에 대해 집중적으로 소개했다.
참관단 일행을 맞이한 카차 본 다마로스 씨는 자신의 업무는 ‘로비아르바이트’라고 소개했다. 로비아르바이트는 일종의 정치 활동으로 사회복지 영역을 담당하는 정부 주무 부서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디아코니아 관련 법 개정에 개입한다. 노동부, 가족복지부, 보건부 등이 로비의 대상이다.

‘로비’라는 개념이 한국 사회에서는 부정적으로 인식되어 있지만, 독일에서는 디아코니아의 한 영역으로 자리매김했다. 5개 정당과 협력하고 사전에 어떠한 법안이 논의되는지 미리 파악해 독일 교회의 디아코니아와 반하지 않도록 개정에 참여한다. 물론 로비는 투명하게 진행되고, 기독교의 입장을 대변하기 위해 다양한 대화와 미팅의 기술을 동원하기도 한다. 이를 통해 EKD는 재정을 얻기도 하고 법안을 얻어내기도 한다.

다마로스 씨의 설명을 듣고 있자니, 한국 교회도 정부의 법안이 논의되는 과정에서부터 관심있게 참여하는 ‘로비아르바이트’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체로 입법과정에서 정보를 얻고 뒤늦게 단체행동에 나서는 한국 교회의 모습을 볼 때, 정부 및 정당과 항상 유기적인 관계를 갖고 정책에 대한 교회의 의견을 상시로 전달하고 조율하는 일이 매우 중요해 보였다.

다마로스 씨는 독일의 사회복지 체계가 총 6개로 나뉘어져 있다고 말했다. ‘자율복지기관연맹’(Federal As sociation of Free Charitable Organisations)라는 이름 아래 독일 기독교사회봉사국과 가톨릭 카리타스, 독일 유대인 복지센터, 적십자사, 노동자복지조합, 독일평등복지사업협회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들은 서로 연합해서 일을 한다. 하지만 “교회의 의미가 점점 축소되는 상황에서 비종교단체들은 성장하는 반면, 교회 기관들은 많은 어려움이 직면해 있다”고 말했다. 기독교인 자원봉사자를 확보하는 것부터 재정적인 운영까지 실제로 독일 디아코니아 기관들도 상당한 고민을 안고 있었다.

베를린에 모인 참관단은 다시 한번 간담회를 열고 한국 교회 디아코니아가 나아갈 방향을 모색했다. 예장 합신 박종언 목사는 “우리가 가난할 때 세계 교회의 도움을 받던 시절이 있었는데 이제는 우리도 함께 삶을 일구고, 희망을 줄 역동성이 생겼다”며 “한국 교회가 감당할 많은 역할에 대한 기대를 안게 됐다”고 말했다.

일정 내내 통역을 맡았던 김성근 선교사는 “신학적 논쟁으로는 에큐메니칼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사회봉사 현장에서는 ‘연합’이 가능하다”며 “삶의 현장에서 봉사를 통한 연합이 신학적 화해까지 이뤄낼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며 한국 교회가 디아코니아를 통해 연합하길 바란다는 과제를 던져 주었다.
총 11박 12일에 이르는 독일 교회 디아코니아 현장 방문은 함부르크에서 끝났다.

함부르크 비헤른하우스. 독일 디아코니아의 초석을 놓은 요한 힌리히 비헤른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이다.
독일 북쪽 항구도시 함부르크는 요한 힌리히 비헤른의 ‘라우에 하우스’가 있는 곳. 실천을 강조했던 비헤른은 고아들을 위한 직업교육을 시작으로 학교를 세우며 청소년 구호사업을 전개했다. 그리고 20세기 들어 양노원과 사회심리부적응자 구호사업이 생겨났고, 21세기에는 장애인 구호사업으로 발전했다.

교회 전체가 디아코니아에 동참해야 한다는 과제를 남긴 비헤른의 사상은 ‘라우에 하우스’를 통해 여전히 계승되고 있었다. 수백년을 이어지는 ‘디아코니아’ 시설. 그것은 독일 사회에 교회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주는 것임과 동시에, 섬김의 신학과 실천이 조화를 이룬 현장을 통해 독일의 사회복지까지 끌어 올리는 결과를 낳았다.

한국교회희망봉사단 사무총장 김종생 목사는 “연합과 일치의 정신으로 디아코니아의 과제를 풀어가야겠다”며 “특히 종교개혁자들의 여러 가르침 속에서 우리가 디아코니아의 소명을 잊고 살았다. 더 큰 열정으로 함께 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번 독일 방문은 한국 교회에 여러 과제를 던져준 소중한 경험이었다. 디아코니아 신학의 정립과 확산, 그리고 교회 안에 체계를 갖춘 디아코니아 봉사자 양성, 종합적 사회봉사 체계 마련과 정부 정책까지 넘나드는 독일 디아코니아의 실제적인 역할을 보면서 한국 교회가 가야할 길이 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시작은 이미 절반을 넘어선 것. 독일 교회를 둘러본 참관단들은 ‘섬김과 봉사’만이 한국 교회를 하나로 모아낼 가장 열정적인 ‘동력’이라고 확신했다.  

<독일 함부르크=이현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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