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본질 훼손하고 영적 타락의 늪으로 빠져
상태바
교회 본질 훼손하고 영적 타락의 늪으로 빠져
  • 운영자
  • 승인 2011.10.26 10:5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종교개혁, 그리고 한국교회(상) -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무엇인가

▲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변함없는 신앙을 지키고자 순교를 각오했다. 한국 교회도 세속화된 사회 속에서 교회의 본질과 신앙의 정체성을 지키려는 강한 믿음과 의지가 필요하다. 사진은 '카타콤의 순교자들'.
‘모이자, 돈내자, 집짓자’라는 설교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타락상 답습
교회 본질ㆍ정체성 회복하는 유일한 길과 답은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

올해로 494주년을 맞이한 종교개혁주일. 한국 교회를 향해 개혁을 촉구하는 목소리들이 여기저기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 한국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세계교회사적으로도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의 발전과 성장을 이뤄냈지만 동시에 신학적이고 실천적인 문제들로 심각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며 종교개혁자들의 신앙과 신학적 유산을 바탕으로 성경적인 신앙으로 다시 돌아가 교회 갱신의 노력을 전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본지는 ‘종교개혁, 그리고 한국 교회’라는 주제로 두 차례에 걸쳐 한국 교회의 현재 모습을 진단하고, 개혁에 직면한 한국 교회에 가장 필요한 메시지는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보려고 한다. 교회사와 실천신학을 연구하는 신학자들의 주장을 통해 한국 교회가 추구해야 할 종교개혁의 신학과 신앙의 정신을 되살려보자 <편집자 주>

▲ 배덕만 교수(복음신학대학원대학교. 교회사)
# 로마 가톨릭교회, 그리고 한국 교회
지난 100여 년의 세월 동안, 한국 교회에 대한 비판과 걱정의 소리가 요즘처럼 심각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한국교회에 대한 비판은 단지 안티기독교 세력만의 전유물이 아니며, 비판의 근거 또한 전적으로 부당한 것이 아니다. 한국교회를 사랑하는 이들 안에서도 걱정의 탄식, 우려의 한숨이 끊이질 않고 있다. 이런 비판과 걱정의 내용은 대략 3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무엇보다 한국교회가 교회로서 본질을 상실했다는 탄식이 가장 처절하다. 물론, 한국교회 내에 일치된 교회론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상식적 차원에서 교회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곳이다. 하지만 근래의 한국교회는 하나님 예배와 이웃사랑에 심각한 문제점을 노출하고 있다.

예배에서 하나님이, 봉사에서 이웃이 실종되고 있기 때문이다. 예배의 중심은 하나님 대신 목회자가, 성령의 폭발적 역사 대신 정교한 예배 콘티가 자리하고 있다. 이웃사랑이나 복음전도도 이웃과 복음에 대한 진정한 사랑 대신, 교회성장의 전략적 도구로 활용되고 있다. 이것은 종교개혁 직전, 예배는 화려한 공연으로 변질되고, 교황은 하나님의 영광을 찬탈하며, 신학은 교권의 주구로 전락했던 로마가톨릭교회의 현실과 너무 많이 닮았다. 이런 교회를 향해 세상이 비판의 칼을 가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

성직자들을 포함한 기독교인들의 영적·도덕적 타락이 도를 넘었다. 영적 타락은 신학의 부재 혹은 왜곡에 기인하며, 도덕적 타락은 교회의 세속화에 일차적 원인이 있다. 그리고 양자는 필연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성과 속은 적절한 긴장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이것이 건강한 종교의 핵심이다. 하지만, 한국교회는 자본과 이념의 폭력 앞에 너무 쉽게 굴복함으로써, 세상과의 적절한 거리 유지에 실패했다.

“모이자, 돈내자, 집짓자”가 설교의 핵심이 되고, 교회성장학과 긍정의 힘이 주류신학이 된 상태에서, 건강한 영성, 성숙한 신학을 기대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중세 말, 교회와 수도원은 영적 부패의 온상이었고, 성직자들은 돈과 권력의 철장에 갇혔다. 신학자들은 타락한 교회에 신학적 면죄부를 제공했으며, 타락한 성직자들은 그 무대에서 추한 굿판을 벌였다. 당시에 교회는 악의 원천이었다.

한국교회는 개신교의 정체성 및 자존심도 상실했다. 개신교(Protestantism)의 본질은 타락한 기성교회에 대한 저돌적 저항(protest)에 있다. 하지만 한국교회는 더 이상 자신의 그런 역사와 정체성에 관심이 없어 보인다. 다만, 당장의 생존과 현상유지에 급급하다. 절박한 생존논리 앞에 이상(理想)은 배부른 자의 몽상에 불과하다. 정글 같은 경쟁사회에서 현상유지는 지상과제이며, 이런 현실에서 개혁은 그림의 떡일 뿐이다.

개척교회는 매일이 종말이고, 대형교회는 이미 실현된 천국이다. 누구의 머리에도 회개와 개혁이 존재할 틈은 없다. 모두가 치열한 현실논리에 종속되어, 이미 종교 아닌 종교로 변질되고 있다. 종교개혁 직전의 가톨릭교회도 다르지 않았다. 이미 시작된 교회건축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금을 모아야 했다. 비판의 소리가 높았지만 성직자들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이미 차지한 자리와 권세를 유지하기 위해, 교권은 일체의 저항을 용납할 수 없었다. 절박한 현실이 모든 비행을 정당화했고, 그런 정황에 대한 도전과 비판에는 피의 응징이 따를 뿐이었다. 파국을 향해 돌진하던 고장 난 전차가 바로 로마교회였다.

# 종교개혁, 그리고 한국 교회
그렇다면 절체절명의 벼랑 위에 서 있는 한국교회에게 2011년에 다시 맞이하는 종교개혁기념일은 무슨 의미일까? 왜 우리는 이 날을 되새겨야 할까. 무엇을 오늘에 되풀이해야 할까. 이를 통해, 우리는 정말 어떻게 ‘개혁’되어야 할까?

먼저, 교회의 본질을 상실했다는 비난 앞에서, 하나님과 이웃을 상실했다는 치욕적 공격 앞에서, 한국교회는 16세기 개혁자들이 외쳤던 Sola Scriptura의 구호를 기억해야 한다. 개혁자들의 눈에, 중세교회의 타락은 성경의 부재에서 기원한 것이며, 따라서 이것의 치유도 성경의 회복에서 찾을 수밖에 없었다. 루터, 츠빙글리, 그리고 칼빈 모두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재발견했다. 성경을 읽을수록, 로마가톨릭교회가 하나님과 상관없는 종교라는 확신이 확고해졌다.

이런 비판에 대해, 로마 가톨릭교회는 “너희가 성경을 집적거린다는 사실자체가 너희가 이단임을 입증하는 것이다”라며, 정당한 비판에 귀를 막았다. 교회가 본질을 회복하는 유일한 길은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성경 속에서 하나님의 진면목을 발견하는 것이다. 단지 성경을 읽고, 필사하고, 암기하는 차원을 넘어, 성경 속에서 지금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준엄한 음성을 듣는 것이다. 그리고 말씀의 권세 앞에 겸손하게 무릎 꿇는 것이다. Sola Scriptura, 이것만이 살 길이다.

영적·도덕적 타락에 비틀거리는 한국교회는 재침(세)례파들의 급진적(radical) 신앙에 주목해야 한다. 주류종교개혁자들이 이신칭의에 만족할 때, 그들은 한걸음 더 나아갔다. 단순한 신자의 수준에 머물지 않고, 주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 죽음도 불사했다. 종교개혁마저 세속권력의 비호 속에 진행되던 시절, 그들은 단호하게 정교분리를 주장했다. 종교개혁자들마저 생존을 위해 무기를 들던 시절, 그들은 “칼로 선 자는 칼로 망한다”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했다.

그들은 세속의 권세보다 하나님의 권위를 더 존중했고, 세속의 이념보다 주님의 말씀에 더 순종했다. 타락한 세상과 교회 한복판에서 하나님에 대한 자신들의 신앙을 삶으로, 심지어 죽음으로 실천했다. 그들은 정녕 십자가를 진 자들이었다. 세속도시에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뒤를 따르는 것이 점점 더 어렵다. 하지만 그 길이 우리의 길이다. 그렇게 살다 가는 것이 신자의 운명이다. 주님이 가신 길이요, 주님이 바로 그 길이기 때문이다.

개신교적 정체성과 자존심마저 상실했다는 비난은 정녕 비난의 끝이다. 존재가 부정되기 때문이다. 이 순간, 한국교회는 복음에 대한 확신 속에 교황의 칙령을 불태우고, 황제 앞에서 자신의 신념을 강력히 설파했던 루터의 당찬 기상을 회복해야 한다. 성경, 믿음, 그리고 은총의 진가를 발견한 자들에게 세상의 쾌락은 더 이상 유혹의 미끼가 아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심오한 사랑을 발견한 자들에게 세속의 폭력은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다. 교황의 종교재판도, 황제의 제국의회도, 진리를 발견한 개혁자들의 거침없는 발걸음을 막을 수 없었다. 그것이 개혁자들의 정체성이며 자존심이었다. ‘기독교’가 ‘개독교’로, 이제는 ‘괴독교’로 추락하는 현실에서, 더 이상 떨어질 곳도 없는 밑바닥에서, 한국교회는 다시 한 번 루터의 불꽃같은 눈빛을, 그의 가슴을 요동쳤던 뜨거운 열정을 회복해야 한다. 우리의 현재 모습이 우리의 본래 모습은 아니다.

종교개혁을 통해 타락한 서구문명에 생명의 새 기운을 불어 넣었던 개신교회가 2011년 한국 땅에서 개혁의 대상으로 추락한 것은 역사적 비극이다. 더욱이 자신들이 극복하고자 했던 중세말의 부패한 천주교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현실은 참담한 치욕이다. 하지만, 인간의 위기는 늘 하나님의 기회다. 밤이 깊을수록 새벽이 가깝다. 2011년에 1517년을 기억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