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종교개혁 발상지 독일에서 ‘디아코니아’의 길을 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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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종교개혁 발상지 독일에서 ‘디아코니아’의 길을 찾다
  • 독일 하이델베르크 =이현주
  • 승인 2011.10.19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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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과 실천이 조화 이룬 디아코니아 도시 ‘하이델베르크’

개혁교회의 디아코니아 독일 복지시스템의 초석을 놓는 역할 감당
디아코니연구소 신학적 기틀 마련... 도시선교회는 조건 없는 섬김

보름스 제국의회가 열린 곳. 이곳에서 루터는 자신의 의지를 꺾지 않았다.

최근 바른교회아카데미가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10년 후 한국 교회를 위해 지금 가장 필요한 일은 ‘디아코니아’라는 주장이 모아졌다. 부정과 부패로 사회적 신뢰를 잃어가는 한국 교회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디아코니아’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섬김’ 혹은 ‘봉사’로 풀이할 수 있는 디아코니아(Diakonia). 사실 디아코니아는 ‘종교개혁’과 함께 출발했다. 말씀을 민중에게 돌려준 개혁자들은 디아코니아를 통해 가난한 이웃을 섬기며 하나님의 사랑을 몸소 실천했다.

지난 3일부터 14일까지 독일과 프랑스 인근 지역의 디아코니아 시설을 참관한 한국교회사회봉사기획단은 “종교개혁의 정신에 디아코니아가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그리고 독일의 선진 복시시스템의 뿌리에 개혁교회의 디아코니아 신학과 실천이 깊이 깔려 있음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이델베르크대학 디아코니연구소를 시작으로 독일 디아코니아의 아버지로 불리는 요한 힌리히 비헤른의 ‘라우 하우스’까지 총 7곳의 사회봉사 시설을 돌아본 기획단은 독일 교회의 디아코니아 사역이 ‘연합과 자립’에 집중되어 있고 ‘종교를 초월한 조건 없는 사랑’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사실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개교회별로 난립된 한국 교회의 사회봉사를 ‘디아코니아 신학’으로 묶어내고, ‘연합’해 내야 한다는 과제를 깨달았다.

독일 디아코니아 기관 순례를 주관한 한국교회희망봉사단 김종생 사무총장은 “한국 교회를 하나로 모아낼 수 있는 희망을 ‘디아코니아’에서 찾았다”며 “개혁자들이 보여준 섬김의 정신을 회복하는 한국 교회를 위해 기도하는 귀중한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예장 통합과 대신, 기성, 합신 등 주요 교단 사회봉사 담당자들과 한국교회희망봉사단, 기독교사회봉사회, 기독교연합봉사회 등 3개 사회봉사 연합기관 실무자들이 참석한 이번 순례의 여정은 한국 교회 디아코니아 연합의 첫 걸음으로 평가됐다. 본지에서는 12일간의 동행취재를 통해 살펴본 독일 교회의 디아코니아 사역과 종교개혁자들의 디아코니아 정신을 세 차례에 걸쳐 연재한다. <편집자 주>

하이델베라크대학 디아코니연구소.
인천공항을 출발해 비행기로 10시간, 하늘에서 바라본 독일의 첫 인상은 ‘푸른 숲’으로 각인됐다. 아름답게 흐르는 강물과 도시를 둘러싼 숲의 우거짐은 풍요로운 독일을 말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독일도 어려운 시절이 있었다. 산업혁명 여파로 생겨난 19세기 도시 빈민들, 1, 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지는 전쟁 속에서 방치된 아이들과 폐허가 된 도시. 누군가 손을 잡아주기 전에 홀로 일어서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자조했던 때가 그들에게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 독일은 세계에서 손꼽히는 ‘복지국가’다.

번 한국교회사회봉사기획단이 독일을 선택한 이유도 단연 독일의 돋보이는 복지시스템이 한 몫 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독일의 사회복지가 종교개혁자들의 디아코니아 영성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과 그들의 ‘사회국가’ 시스템 역시 디아코니아의 실천과 함께 형성되었다는 점이다. 교회의 섬김이 국가의 제도를 변화시킬 수 있고,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복지시스템까지 마련할 수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리고 먼저 ‘실천’하는 것으로 시작한 독일의 디아코니아는 ‘신학적 기틀’을 잡아가며 교회의 본질을 바로 세워가고 있었다.

# 보름스에서 만난 루터

프랑크푸르트에서 첫 밤을 보낸 기획단이 이튿날 아침 일찍 향한 곳은 보름스였다. 1521년 보름스 제국의회에서는 루터에게 자신의 주장을 취소할 기회를 주었다. 당시 루터는 비텐베르크 성 교회 문에 95개조 반박문을 써 붙이며 교황과 사제들의 면죄부 판매에 저항했다.

마치 약장사들처럼 “궤짝에 돈을 넣으면 그 즉시 당신들의 영혼은 천국으로 갈 수 있다”며 면죄부를 팔아댔던 수도사들을 비판한 루터는 “가난한 신도들의 돈을 뜯어 성당을 짓고 치장하는 것”에 대해 강하게 질타했다. 그리고 ‘돈’은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는 ‘디아코니아’를 강조했다. 종교개혁의 정신에서 디아코니아는 출발했다.

보름스에서 만난 루터는 자신의 신앙을 확고히 지키고 있었다. 제국의회 앞 동판에 새겨진 글씨는 그의 신념을 잘 드러내고 있다.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다. 나는 아무것도 철회할 생각이 없다. 왜냐하면 양심에 반한 행위는 위험하며,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하나님, 저를 도우소서. 아멘.”

돼지 사냥을 하듯(보름스의회 건물 안에는 루터를 돼지로 묘사한 그림이 남아 있다), 추방과 살해의 위협을 받은 루터였지만 그는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돈으로 죄를 사할 수 없다는 개혁의 첫 출발지에서 헌금과 기도면 그 뿐이라며 기복신앙에 빠진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았다. ‘나’의 구원에 집중된 한국 교회가 잃어버린 것은 ‘이웃’이었고, 지금 우리에겐 종교개혁의 첫 마음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디아코니아학의 본고장 하이델베르크

약속된 시간을 맞추기 위해 서둘러 보름스를 떠나 도착한 곳은 하이델베르크대학 신학부 디아코니연구소(DWI). 디아코니아의 신학적 체계를 만드는 권위 있는 연구기관인 이곳은 55년 역사를 간직하고 있었다.

신학의 주요 주제로 떠오르고 있는 디아코니학은 다양한 섬김에 대한 학문적 정당성과 역사적 근거를 제시하는 학문이다. 5대 소장 요하네스 오이리히(Johannes Eurich) 교수는 “직업에 관한 윤리적 문제와 사회봉사를 현대적으로 개발하는 방법, 사회봉사국의 경제적 자립과 생존 등 다양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고 소개했다. 그야말로 디아코니학의 범위가 얼마나 방대한지를 알 수 있는 설명이었다.

3대 소장이었던 테오도르 스트롬(Theodor Strohm) 교수는 보다 본질적 의미에서 디아코니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디아코니학의 대부로 알려진 스트롬 교수는 일행을 반갑게 맞이하며 “디아코니아는 세계화 시대 중요한 교회의 역할 중 하나”라고 강조했다. 스트롬 교수는 “디아코니의 임무는 구약과 신약에 나온 것을 함께 묶어내는 것으로 약속된 그리스도를 통해 섬기고, 앞으로 오실 그리스도를 위해 디아코니를 함께 실천하는 것이 우리의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리스도인은 가정이나 사회, 교회 등 자신이 속한 모든 곳에서 자유롭게 섬기는 자로서 역할을 다해야 한다”며 그리스도인의 책무를 강조했다. 이어 “늘 주변을 살펴 어려운 상황에 처한 이가 없는 지 돌아보아야 하고, 그것을 소홀히 하면 교회의 위탁받은 명령을 소홀히 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리고 한국 교회에 ‘화해’의 화두를 남겼다. 스트롬 교수는 “디아코니학의 핵심은 ‘화해’”라며 “남북 이데올로기 분단과 다문화 사회 등 지금 한국 사회에 필요한 것은 화해지만, 만남과 대화가 없이는 화해가 없다”는 말로 통일을 위해 교회가 섬겨야할 방향을 제시했다.

하이델베르크 디아코니연구소 방문은 한국 교회 사회봉사에 있어서 ‘신학’적 고민과 연구가 절실하다는 과제를 안겨주었다. 우리의 사회봉사나 복지 참여가 적은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연합하고, 체계화되지 못하는 것은 ‘복지학’의 영역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라는 반성이 들었다.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이웃사랑’의 실천, 이것을 신학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고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노력이 시급해 보였다.

# 1400여 직원이 일하는 ‘도시선교회’

하이델베르크 도시선교회. 이곳에서는 조건없는 섬김을 실천하고 있다.
언덕 위 하이델베르크 성이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는 아름다운 도시 풍경이 잠시 일행들의 발을 붙들었다. 마을건물들과 어우러진 하이델베르크대학, 교회 벽을 따라 문을 연 상점과 사람들로 북적이는 거리가 활기찼다. 그 북적이는 거리 한 가운데 ‘하이델베르크 도시선교회’가 있었다.

일행을 맞이한 플로리안 바트 목사는 디아코니아교회를 소개하며 이곳에서 선교회가 시작됐음을 말해주었다.

도시선교회 산하에는 4개의 교회가 있고, 2개의 병원과 7개의 노인요양시설, 알코올 중독자 시설, 긴급구호소, 유치원과 유아원, 상담소 등이 있다. 150년 역사가 일구어놓은 결과물이다. 이 모든 기관에서 1400명의 직원들이 일을 한다. 하이델베르크는 독일에서 비교적 부유한 도시. 이런 곳에서도 디아코니아 사역이 필요할까 궁금했다.

바트 목사는 “주민의 10% 정도 가난한 이웃이 있고, 그들과 이주자, 노인들을 위한 사역이 진행된다”고 말했다. 새롭게 단장한 교회 안에 작은 주방과 테이블이 눈에 띄었다. 바트 목사는 “이곳에서는 매일 아침 40-50명에게 식사를 제공하고 있다”며 “가장 상징적인 일”이라고 소개했다. 교회를 새롭게 단장한 이유는 거리에서의 급식을 교회 안으로 옮겨 보다 좋은 환경을 제공하기 위함이다. 바트 목사는 “가난한 사람들도 좋은 공간과 시설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도시선교회는 이웃을 위해 ‘보편적 가난’에 대한 강좌를 개설하고 컴퓨터와 영어, 노래와 요리 등 일주일에 5-9개의 강좌를 들을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또 이주자를 위해 모임과 상담 등의 사역도 진행한다.
독일 이주자들은 아프리카, 페르시안, 남미, 불어권 등 자신들의 독자적인 교회를 건설하고 있다. 바트 목사는 “우리는 그들의 예배를 도와주면서 독일 교회와 교제할 기회를 제공한다. 이주자가 어려움에 처할 경우 독일 교회가 주 정부에 부탁해 민원을 처리하는 일도 감당한다. 각자 모이는 교회지만 우리는 하나의 공동체라는 사실이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하이델베르크 도시선교회는 신실한 기독교인들이 일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종교보다 ‘전문성’을 더 필요로 하고 있다. 기획단 일행은 한국 교회의 사회봉사가 ‘선교’와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영혼구원’의 문제를 제기했다.

이에 대해 바트 목사는 “우리 선교회도 봉사자 모두 신앙인으로 구성하느냐는 큰 논쟁점이었지만 지금은 요양소 전문 인력을 고용하는 것이 중요하고, 누구든 선교회에서 도움을 받는 것에 중점을 둔다”고 설명했다.

하이델베르크 거리. 도시선교회는 이 거리 가운데 있다.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지만 그들의 사역 속에는 보이지 않는 신앙이 깊이 깔려 있음도 강조했다. 요양소 인력을 양성할 경우 3년의 교육과정은 예배로 시작하고 예배로 끝난다. 매년 11월에는 노숙자를 위한 예배를 드리고, 중독자를 위한 참여와 기도의 날 예배도 진행한다.

바트 목사는 “예배를 거부하는 이들은 없다”며 “예수님을 믿지 않는 이들도 정성껏 예배에 참여하고 3년 교육을 마치면서 주님께 돌아오는 형제들도 있다”고 말했다. 이어 바트 목사는 “가버나움에서 백부장이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 그 또한 당시 어떤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았겠냐”며 “예수님은 그들의 종교를 묻거나 가리지 않았다”며 디아코니아 사역은 종교와 이념을 초월한 ‘무조건적 섬김’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화려한 도시 아래 150년 역사를 이어온 하이델베르크 도시선교회. 섬김의 대상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바뀌어 갔지만 그들의 사역은 여전했다. 오히려 더 많은 일로 섬기는 도시선교회 사역은 묵묵히 그 책임을 다하고 있었다. 신학과 실천이 조화를 이룬 도시 하이델베르크는 디아코니아의 최고 수혜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촉박한 시간에 밀려 도시선교회의 더 많은 사역을 돌아보지 못한 아쉬움을 뒤로한 채 기획단은 옛 독일 점령지였던 ‘스트라스부르'로 향했다. 지금은 프랑스 땅인 그곳에서는 또 어떤 디아코니아의 역사와 사례를 만날 수 있을 지 설레는 마음으로 두 번째 밤이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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