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후 기독당 창당은 신앙 지키기 위한 고육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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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기독당 창당은 신앙 지키기 위한 고육책
  • 최창민 기자
  • 승인 2011.09.26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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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정당 논란 ① 해방 후 기독교 정당사

기독교 정당 창당에 대한 논란이 뜨겁다. 한국 교회 내부에서도 비판이 거세다. 보수 교회 지도자들은 지난 17대 총선과 18대 총선에서 잇달아 기독교 정당을 창당해 국회 진입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그리고 또다시 내년 19대 총선을 앞두고 기독교 정당 창당 논의가 벌어지고 있다. 이에 본지는 특별기획을 통해 해방 후 한국 근현대사에 나타난 기독교 정당과 관련한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고, 기독교 정당 찬반 논란, 바람직한 기독교인의 정치 참여 등을 다룰 예정이다. <편집자주>

# 해방 후 북한 교회의 정치 참여
최초의 기독교 정당 창당 시도는 해방 정국에서 이뤄졌다. 한국의 최초 기독교 정당은 해방 후 한 달여 만인 1945년 9월 18일 신의주에서 장로교 윤하영, 이유필, 한경직 목사 등이 주축이 돼 조직한 ‘기독교사회민주당’(이하 기민당)이다. 얼마 후 비기독교 인사들을 영입하기 위해 ‘기독교’를 빼고 ‘사회민주당’으로 개칭한다.

▲ 남한 보수 교회는 해방 후 민주화에 대한 국민적 열망이 높은 가운데서도 이승만 대통령과 자유당에 대해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다.
이들은 강령에서 “민주주의 정부의 수립과 기독교 정신에 의한 사회개량”을 목표로 한다고 밝히고, 사회민주주의 권력수립과 기독교적 역사관에 의한 점진적인 사회개량을 추진하려 했다. 그러나 기민당의 세력 확산을 우려한 소련정권과 공산당은 11월 1일 신의주 인근 용암포에서 열린 지구당 조직대회를 방해했고 이 과정에서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이른바 ‘용암포 사건’ 이후 반공주의 시위가 확산돼 11월 23일 신의주의 6개 중학교와 부근 학생 5천여 명이 평안북도 인민위원회 보안부, 평안북도 공산당 본부, 신의주 보안서를 습격했다. 공산당은 이들을 강제 진압하고 당도 해산시켰다.

또 1945년 11월 조만식 장로와 이윤영 목사의 주도 아래 ‘조선민주당’이 결성된다(학자들에 따라 조선 민주당을 기독교 정당으로 보는 이들도 있다). 조만식 등은 창당 후 소련군정 및 김일성과 담판을 벌이려 했으나 이듬해 1월 공산당에 체포됐다. 사회민주당을 이끌던 한경직 목사를 비롯한 기독교 지도자들도 생명의 위협을 느껴 월남한다.

그러나 기독교 정당 창당 움직임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2년여를 준비한 끝에 1947년 11월 김화식 목사, 고환규 장로 등은 ‘기독교자유당’을 결성했다. 그러나 북한 공산당은 김 목사를 포함한 40여 명의 교회 지도자들을 투옥시켰다.

이후에도 북한 교회는 특히 북한 인민위원회의 금지에도 불구하고 1946년 당시 길선주 목사가 시무하던 장대현교회에서 3.1절 기념예배를 드리는 등 공산당 정권에 끊임없이 저항했다.

북한 공산주의자들은 정부 수립을 위한 총선거를 1946년 11월 3일 주일에 실시하기로 하고 교회를 선거 장소로 이용하며 북한 교회의 태도를 시험했다. 이에 북한 교회 5도 연합노회는 △성수주일을 생명으로 하는 교회는 주일에는 예배 이외의 여하한 행사에도 참가하지 않는다 △정치와 종교를 엄격히 구분한다 △예배당은 예배 이외의 여하한 경우에도 이를 사용함을 금지한다 △현직 교역자가 정계에 종사할 경우에 교직을 사면해야 한다 △교회는 신앙과 집회의 자유 확보한다 등 5개 항을 결의하며 반대했다.

이후 북한은 교계 지도자 체포 등 교회 탄압에 착수했다. 그해 11월 28일 ‘기독교 연맹’을 결성해 강양욱을 내세우고 김익두, 박상순 목사 등을 포섭해 김일성 지지, 남한 비판 등의 결의문을 체택하며 5도 연합노회에 대항하도록 하고 분열을 획책했다. 또 교계 지도자들의 가입을 종용하고 위협했다.

# 남한 교회의 정치적 무관심
남한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북한과 같은 기독교의 이름으로 정당을 조직하지는 않았다. 1945년 9월 8일 교단 총회에서 해외에서 활동하던 애국지사들을 하나로 규합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교회들의 교파 교회 복귀 여론에 밀려 교단이 해체됐다. 일제하에서 옥고를 치르며 항거했던 보수적 기독교인들은 정치보다는 교회 재건과 쇄신에 관심을 두었다. 반면 자유·진보적 기독교인들은 신사참배와 함께 일제 통치에 협력하는 등 일제에 굴종했던 탓에 국민들의 추앙을 받을 만한 지도자를 세울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남한의 교회는 이승만을 비롯한 기독교인이 대거 참여한 자유당 정부를 맹목적으로 지지하는 경향을 보였다. 1948년 해방 후 교회는 철저하게 정치권력에 순종하거나 무관심했다.

1960년 3.15부정선거 이후 국민적 저항이 큰 상황에서도 보수 교회 지도자들은 자유당을 지지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또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당선을 축하하는 기념예배를 드렸다.

박정희 전두환 등으로 이어진 군사독재정권 시절에도 보수 교회 목회자들은 국가조찬기도회 등을 통해 정치권력의 합법화에 협력했다. 진보적 교회들은 해방신학 등을 통해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독재화에 저항했다. 반면 보수적 교회 지도자들은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내세우며 종교의 정치 중립을 주장했다.

정치 참여에 이중적 태도를 보였던 보수 교회가 태도를 바꾼 것은 2003년 노무현 정권 탄생 이후다. 2003년 1월부터 보수 교회 지도자들은 ‘나라와 민족을 위한 평화기도회’라는 이름으로 대규모 집회를 개최하고 기독교 정당 창당을 주장했다.

이후 고 김준곤 목사(CCC 창립자), 조용기 목사(여의도순복음교회 원로) 등을 중심으로 2004년 2월 발기인 대회를 갖고 김기수 목사를 창당준비위원장으로 선출했다. 2004년 3월 말 63빌딩에서 창립대회를 개최하고 상임대표 최수환 장로, 상임대표고문 김준곤 목사, 상임고문 김기수, 박영률, 조용기 목사를 선출했다. 이들은 기독교 사상을 바탕으로 한 정책정당을 창당한다고 밝히며 △헌법 준수 △국민의 삶 향상 △자유민주주의 이념 수호 △한미동맹 강화 등의 정강정책을 발표했다. 

민주화 후 첫 기독당 실험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해 4월 15일 실시된 17대 총선에서 기독당은 정당득표율 1.1%(약 22만 표)에 머물렀으며 9명의 지역구 후보도 낮은 득표율을 보이며 모두 낙선했다.

# 공산화에 맞서 신앙 지키려는 몸부림
해방 이후 이처럼 북한에서 기독교 정당 창당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에 대해 기독교 역사가들은 북한에 소련군정이 들어서자 기독교인들이 적극적으로 공산정권에 대항하고 신앙과 인권을 지키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기독교 교회사’에서 김영재 박사(전 합신대 교수)는 “이북에는 해외에서 활동하던 독립투사와 애국지사들이 주로 서울로 귀국했기 때문에 정치적 지도자가 결여되었다는 점, 그래서 공산당에 맞설만한 정치적인 단체가 없었다는 점, 그리고 기독교 정당을 조직할 정도로 기독교인 인구가 많았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김 박사는 이어 “무엇보다도 장차 공산당이 집권할 경우 교회가 말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을 내다보고 이를 막아보려는 의도에서 적극적인 정치 참여의 길을 택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총신대 박용규 교수는 “해방 직후 북한교회의 정치참여는 공산정권에 대한 항거의 의미에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으며, 교회와 국가 권력과의 대결은 공산당의 악랄한 전략에 의해 교회의 박해와 수난으로 직결됐다”고 말했다.

안양대 이은선 교수도 “북한에서 이러한 기독교 정당의 조직이 가능했던 것은 공산당의 지배하에 교회를 지키려는 노력이기도 하였지만 북한 기독교의 상당한 세력과 일제하의 교회의 애국적 활동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반면 해방 후 정부와 밀착된 남한 교회의 정치 참여방식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혹독하다. 이 교수는 “이승만이 집권하면서 정권과 기독교가 밀착하는 계기가 됐다”며 “당시 고위관리와 국회, 정당에도 기독교인들이 다른 종교에 비해 월등했다”고 지적했다.

김영재 박사는 “자유당이 장기 집권을 꾀하면서 부패해 갈 때도 교회는 정치와 종교의 분리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모처럼의 종교의 자유를 만끽하면서 정치적인 비판 의식도 없는 윤리 부재의 교회로 성장해 왔다”고 비판했다. 김 박사는 “한국의 보수적 교회는 중립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정권에 무조건 순종하고 방조해 왔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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