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신학의 산실, 기독교서회 120년사
상태바
한국교회 신학의 산실, 기독교서회 120년사
  • 최창민 기자
  • 승인 2010.06.22 10:2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최초 근대 출판사...신학 넘어 교양까지 광범위한 출판

1889년 10월 몇몇 선교사들이 정동에 있는 언더우드 목사의 사택에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사들이 모였다. 이곳에서 기독교 문서 출판사 설립을 논의했다. 이후 언더우드, 죤스, 기포드, 헐버트, 올링거, 벙커, 배위량, 이눌서, 마포삼열, 게일 선교사 등은 1980년 6월 25일 ‘한국성교서회’를 창립했다. 이것이 120년 전 대한기독교서회의 출발이다.

서회 초대 회장 올링거 목사였다. 1893년 그가 은퇴 후 귀국했고, 아페셀러 목사가 2대 회장을 맡았다. 초대 부회장은 허버트, 서기 언더우드, 서기 스크랜턴, 회계 펜위크 등이었다. 초창기 이들은 자기 시간과 돈을 바쳐 서회 일을 시작했다. 또 선교 본부와 교회 기관들의 원조금과 모국의 기관들, 교회의 헌금과 개인의 기부금을 얻어 경영했다. 1980년 서회 설립 첫해 최초의 간행물은 언더우드 목사가 번역한 ‘셩교촬리’였다.

서회의 초기 기독교 문서운동은 복음 전파를 위한 것이었다. 이 때문에 외국서적 중 기독교를 소개하는 내용의 간단한 책, 신앙생활의 방법과 신조를 가르치는 책들이 주로 출판됐다. 민족 계몽에 힘썼던 서회는 전도 목적의 서적은 물론, 일반교양, 위생, 계몽, 어린이, 어학, 지리, 상식, 소설, 사상 서적 등을 발간해 한국 근대화를 이끌었다.

대한기독교서회 정지강 사장은 한국 근대사 과도기 서회의 족적에 대해 “서회는 120년 전 선교사들에 의해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파하기 위해 세워진 기관이지만, 단순히 기독교 서적만 발행한 것은 아니었다”며 “한국 근대 초기 과학, 수학, 지리, 의료 등 근대 지식의 체계를 전달하는 거의 대부분의 책이 서회를 통해 출판됐다”고 말했다.

일례로 지난 1926년 한 해 동안 한국에서 출판된 책이 총 80여종. 그중 절반을 기독교서회가 펴낸 것이었다. 일반출판사에서 펴낸 나머지 40종 가량도 80%는 소설류였고, 의미 있는 책은 대부분 서회를 통해 출판됐던 것이다.

출판 분야도 신학에 국한되지 않았다. 지리, 수학, 과학 교과서는 물론이고 식물학, 서양철학, 해부학 입문서도 있었다. 세부적으로는 임신부의 위생 문제를 다룬 책, 말라리아 퇴치법을 담은 책 등 당시 소외된 민중들의 삶에 직접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는 다양한 책들을 출판했다.

다양한 분야의 출판물에 대해 정 사장은 “당시 서회는 교회 안에 있는 출판 영역에 국한하지 않고, 한국 근대화 초기 사회에 미친 지적 공헌은 엄청난 것이었다”고 평가했다.

서회는 특히 1894년 갑오개혁 당시 옥중전도문을 만들어 옥중의 개화당 지도인사들을 전도했다. 이 중에는 이원긍, 이상재, 이승만 등이 포함돼 있었다. 이들은 후에 한국 교계의 지도자들이 됐다.

서회는 1915년 주간지 교회 연합 신문 ‘긔독신보’의 발행을 시작했다. ‘긔독신보’는 국내는 물론 일본, 만주, 중국, 시베리아까지 발송돼 한국 교포들에게 한국 교회의 소식을 전했다. 또 1919년부터 서회는 연합공의회의 자금으로 ‘합동찬송가’를 발행했다. 서회는 당시 찬송가 발행을 통해 상당한 수익을 얻어 출판 사업에 큰 도움을 얻었다.

서회의 공헌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서회를 통해 나온 모든 간행물은 한글로 출판됐다. 이를 통해 한국 사회에 한글이 깊숙이 보급됐고, 문맹률 완화에 크게 기여했다. 정 사장은 “당시 서회를 통해 한글이 보편화되면서 사회 주류에서 제외됐던 부녀자나 서민들을 역사에 동참시키는 결과를 가져왔고, 이로 인해 결과적으로 사회변혁의 동인이 됐다”고 말했다.

그는 “서회는 한국의 독립운동에도 영향을 미쳤다”며 “당시 선교사들은 개화기에 투옥됐던 민족진영의 혁명지사들을 대상으로 전도대를 조직해 옥중전도를 실시했으며, 이승만 박사(초대 대통령)도 옥중 전도지를 통해 기독교인이 됐다”고 소개했다.

당시 서회를 통해 발행된 문서와 서적이 사회 혁신 세력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고 결과적으로 한국 사회 정치변혁과 개화를 이끌었다는 것이다. 특히 1930년대 말 일제에 의해 강제 폐간될 때까지 발행됐던 ‘긔독신보’는 국내뿐만 아니라 일본, 만주, 시베리아까지 보급되면서 한국인들에게 민족의 일체감과 애국심을 고취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30년대 일본의 한국 식민정책에 따라 외국 선교사들에 대한 경계가 심해졌다. 1935년 9월 ‘긔독신보’ 발행권이 찬송가 판권과 함께 상실됐다. 하지만 이후 서회 중심으로 교파들이 연합해 ‘합동 찬송가’를 만들었다.

또 1942년 5월 22일 일본 관청은 기독교서회 재산을 적산이라고 선언하고 일본인 지사를 관리인으로 지정, 한국인 직원을 해고하고 서적과 재산을 약탈했다. 그 기간 동안 서회는 물리적 수난을 당했고, 동시에 출판 산업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해방 후 서회는 1948년 3월 27일 정식 이사회를 갖고 사역을 다시 시작했다. 1952년 1월부터 어린이 잡지 ‘새벗’을 창간했다. 특히 서회는 6.25 동란 중에도 부산에 셋방을 얻어 ‘새벗’을 발행해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줬다. 또 1954년 12월 서회 건물 5층에서 대한기독교연합회 산하의 기독교 방송국이 입사, 최초의 교회 방송이 시작됐다.

또 획기적인 사건은 1954년 1월부터 1958년 4월까지 작업, 1960년 출간한 ‘기독교 대사전’. 당시 2천만 원의 경비가 든 이 책은 호주 선교회가 3년 동안 출판비를 보조해 편찬이 가능했다. 이후 1957년 8월 교역자와 신학생을 위한 신학적 교양 정기간행물 ‘기독교사상’ 창간호를 발행했다. ‘기독교사상’은 기독교 지성들의 연구와 지식, 신앙적 교양을 개발시켜 주는 촉매 역할은 물론, 한국 기독교 신학사상과 언론의 전달, 대화의 광장 역할을 하게 됐다. 이후 서회는 1976년에 찬송가 외의 일반 서적 간행이 11만부를 넘어섰다.

서회의 주요 업적은 창립 이후 지금까지 4천권이 넘는 단행본 출간이다. 특히 단행본은 기독교 관련 서적뿐 아니라 정치, 사회, 문화, 교양 등 일반 서적도 상당수 포함돼 있다. 또 1913년 주일학교 계단공과, 만국주일공과, 만국통일주일공과 등 다양한 주일학교 교재를 발행해 기독교교육이 정립되고 발전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에큐메니칼 운동의 산물인 대한기독교서회는 교파를 초월한 서적을 만들어 한국인들에게 서구문명과 사상을 소개하고, 동시에 세계에 한국과 한국 기독교를 소개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올해 서회는 국내 신학자들이 필자로 참여한 ‘대한기독교서회 100주년 기념 성서주석’이 완간할 예정이다.

120주년을 맞은 대한기독교서회 역사에 대해 연세대학교 서정민 교수는 “서회 120년의 역사는 한국기독교의 역사적 공헌과 문화적 성과를 제시할 때 가장 처음 거론해야 할 발자취”라고 높게 평가했다.

서회의 과제에 대해서는 “서회는 한국기독교의 역사적 공헌, 특히 예언자적 비판과 선언의 역할을 지난 시대보다 잘하고 있지 못하다”고 지적하고 “서회의 장구한 역사는 한국기독교의 문화, 언론, 학술의 전체 지평을 망라하고 있기 때문에 그 영향력과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서회는 다시 한 번 새로운 교섭의 테마를 설정할 때에 와 있다”고 말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